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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민 Jul 23. 2019

하노이에서 축구 보기

하노이와 호앙잘라이의 빅매치를 보다가 문득 K리그 생각이 나서

눈을 떴다. 잠에서 깼다. 책상 위에서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띵, 띵, 띵. 하노이에 있어? 오늘 항다이에서 빅매치가 있는데 올래? 연락해. 소셜미디어는 참 성실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좌표를 잘도 일러바친다.

부랴부랴 베트남 프로축구리그(VPF) 사무국으로 달렸다(말이 그렇다는 거지, 택시 타고 갔다). 연간 취재증을 수령하라는 이메일을 받은 지 딱 3개월째였다. 다행히 홍보팀장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친절하게 취재증을 건넸다. 신깜언. 아주 고맙다는 뜻이다.

항다이는 축구 경기장 이름이다. 하노이 시내에 있다. 2003년 미딩국립경기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이곳이 베트남 국가대표팀의 홈그라운드였다. 본부석 맞은편 스탠드에 호찌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국부의 ‘간지’가 흐른다. 수용인원 2만2천 명의 종합경기장. 구석마다 먼지가 뽀얗다. 동선도 비효율적이다. 그래도 이곳은 베트남 축구의 아련한 추억을 머금고 있다. 동대문은 없어졌지만 항다이는 살아있다.

이날 매치업은 하노이와 호앙잘라이의 V리그 맞대결이었다. 총 14개 팀 중에서 하노이는 2위, 호앙잘라이는 13위다. 하지만 빅매치였다. 하노이는 하노이의 인기팀, 호앙잘라이는 베트남의 인기팀이다. 양 팀은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거느린다. 하노이에는 최고 스타 응유엔 쾅하이가 있다. 유럽 진출설이 있는 풀백 도안 반하우도 있다. 호앙잘라이 에이스는 쯔엉이다. 베트남 풀네임은 루언 쑤언쯔엉이다. 참, 콩푸엉의 원소속팀도 아직 호앙잘라이.

항다이 경기장 미디어게이트(노란 철문) @직찍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아주머니가 티켓 한 움큼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베트남 축구 경기장 주변에는 이런 암표상들이 넘친다. 한 팬이 리그 측의 티켓 판매원에게 다가갔다. 암표상 둘이 코앞에서 “아저씨, 이 표를 사야지”라는 듯이 손님을 낚아챈다. 리그 직원은 딱히 제지하지 않는다. ‘저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라는 표정이다. 이곳 생태계의 질서인 것 같았다.

한 시간 전부터 본부석은 꽤 많은 부분이 차 있었다. 관계자가 알려준 기자석도 이미 일반 관중이 몽땅 차지했다. 아침부터 메신저를 보냈던 현지 기자에게 “너는 어디에 앉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빈자리”라고 대답했다. 베트남 축구 기자들은 현장 스트레이트를 작성하지 않는다. 덕분에 이들은 책상, 전원, 인터넷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국 기자들에게 저 세 가지는 생명줄인데. 

본부석 2층 측면에 자리가 비어 있었다. 휴지를 꺼내 의자 위에 두툼하게 덮인 먼지를 닦고 앉았다. 한 팬이 다가와서 먼지를 닦고 동그랗게 만든 휴지를 가리켰다. “다 썼으면 내게 주겠니?”라는 뜻일 게다. 줬더니 냉큼 받아서 자기가 앉을자리를 열심히 닦았다. 그 휴지는 최소 다섯 개 이상 의자를 닦은 뒤에야 수명을 다했다. 꼬질꼬질 너덜너덜.

저녁 7시에 킥오프, 하노이의 선제 득점, 후반 추가 5분 호앙잘라이의 극적 동점골이 이어지는 동안 기온은 3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2층 구석 빈자리에서 전반전을 보는 동안 등줄기를 타고 굵은 땀이 흘렀다. 더워서 앉아있기가 버거웠다. 하프타임에 인터뷰실로 도망쳤다. 에어컨은 한눈을 팔고 있었지만 실내인 덕분에 공기가 서늘했다.

호앙잘라이의 감독은 한국인 이태훈 감독이다. 캄보디아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다가 올 시즌부터 호앙잘라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입증하듯이 이태훈 감독의 팀은 강등권에서 헤매고 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태훈 감독은 영어로 질답에 응했다. 귀에 익은 한국식 영어가 반가웠다. 강적 하노이 원정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둔 만큼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원정팀 호앙잘라이 서포터즈 @직찍


베트남에서 축구를 구경하면 한국과 정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프로축구는 축구보다 인프라가 앞선다. 2002 월드컵 덕분에 한국은 세계적 스타디움을 한꺼번에 얻었다. K리그의 운영 시스템도 세계적으로도 톱클래스에 해당한다(믿거나 말거나). 다만 축구와 그 분위기가 떨어진다. 2019년 관중이 증가했다고 하는데 갈 길이 한참 멀다. 현재 숫자의 최소 3배, 5배는 뛰어야 리그가 시장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국내 축구 기사들의 조회 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베트남은 반대다. 국가대표팀뿐 아니라 프로축구리그도 인기가 좋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장 분위기가 좋다. 관중이 적어도 뭔가 열심히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인기팀은 관중도 많다. 하노이의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항다이 근처가 북새통이다. 한국에 없는 축구 전용 TV채널이 있다. V리그 중계 앞뒤로 매거진쇼가 활기차게 방영된다. 그런데 현장 인프라가 엉망이다. 관중 집계가 엉망이다. 공식 관중 수가 백 명 단위, 천 명 단위로 끊어진다. 대충 적는다는 뜻이다. 경기장은 낡았고, 취재 환경은 카오스 그 자체다. 몇 만 명이 한꺼번에 몰리는 현장에서 군중 통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천만하다.


인프라와 축구 분위기. 둘이 같이 가면 참 좋다. 우리가 유럽 빅5 리그를 부러워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그 동네는 역사도 길고, 경기장 시설도 선진적이고, 관중도 많고, 축구도 잘하고, 그래서 구단이 쓸 돈을 스스로 번다. 한국과 베트남은 한쪽이 결핍되어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인프라든, 분위기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결국 축구라는 존재 자체가 제일 중요하다. K리그가 축구인 위주로 돌아가도, V리그 현장이 시장 바닥이어도 별 상관없다. 최소한 나보다 축구를 압도적으로 잘하는 선수들의 90분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꼬질꼬질한 항다이에서 보낸 저녁 시간도 매우 만족스럽다. 세상만사가 내 바람대로만 돌아갈 수는 없다.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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