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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민 Nov 25. 2020

#내것 #11 - 로마 혼돈 소렌토 지갑

평일 로마에선 여권이 없어져도 천리 끝 낭떠러지는 아니다

지난해 연말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계기는 두 가지였다. 우선 대한항공으로부터 ‘내년부터 마일리지를 차감하겠다’라는 무서운 협박을 받았고, 아내가 ‘유럽 고프다!’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쥐어짜 비즈니스 클래스 왕복 티켓 두 장과 맞바꿨다. 출발.


로마 4박 숙소는 스페인 계단 근처로 정했다. 로마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우리가 아는 명소들 대부분 걸어서 구경할 만큼 옹기종기 모여있다. 로마는 우리 기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스페인 계단 앞 아내의 ‘원픽’ 장갑 가게도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지인 선물로는 최고라며 도착 첫날부터 아내는 장갑을 듬뿍 샀다. 예전 이곳에서 아내는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가죽장갑을 사고 좋아했던 것 같다.

다음 행선지는 소렌토였다. 숙소를 체크아웃해서 지하철로 테르미니역으로 이동, 나폴리까지 기차, 나폴리에서 지선으로 환승해 소렌토까지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아침에 서두른 덕분에 우리는 숙소  옆골목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새벽 비에 젖은 골목길 바닥의 돌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30분 후, 나는 장지갑 지퍼를 열어 값을 치렀다. 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왕복 비행기표와 현지 경비를, 아내는 숙박비와 쇼핑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때 나는 지퍼가 달린 폴리에스터 재질 장지갑을 사용했다. 캠핑 감성으로 지갑과 손가방의 중간 어딘가쯤 있는 모양새였다. 지퍼가 달려있어 안전하고 편했다. 계산을 마친 뒤 지갑을 지퍼가 달린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테르미니역까지 완벽하게 도착했고, 우리는 생수를 사러 역사 안 카페로 들어갔다. 계산대 앞에서 돈을 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갖다 댔다. 촉감이 싸늘했다. 잠겨 있어야 할 재킷 주머니 지퍼가 열려 있었다. 그 안에 있어야 할 지갑도 없어졌다. 아.시.발.


숙소 근처 카페에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은 영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카페 한켠에 아내와 트렁크 2개를 둔 채 혼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지하철, 골목길, 카페 그 어디에도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카페 직원은 졸린 눈매로 바닥을 휙 훑어보더니 나를 바라보며 “이봐요. 여기 로마에요”라며 혀를 찼다. 그래, 나도 알아. 로마. 내 손을 떠난 물건이 되돌아오는 기적 따위 절대 없는 곳.


현금 1,200유로, 여권, 신용카드를 한꺼번에 분실했다고 아내에게 최종 보고했다. 한 시간 전까지 완벽했던 여행 기분이 갑자기 곤두박질쳤다. 경기 내내 앞서다가 후반 추가시간 들어 역전골을 먹은 축구팀 감독이 이런 기분인가? 아내는 내 아이폰을 가리키며 “일단 신용카드 분실 신고”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리곤 “여기 가면 임시여권 발급해준대”라면서 네이버 블로그를 보여줬다. 예전 같았으면 펄쩍 뛰었을 아내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성숙해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의 정보는 소금처럼 귀중했고 아내의 침착한 태도는 난로처럼 따뜻했다. 역사 안 포토부스에서 여권 사진을 해결했다. 짐 보관소에 트렁크를 맡긴 뒤에 버스를 타고 한국영사관을 찾아갔다.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친절한 직원을 만난 지 30여 분 만에 나는 임시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누가 한국영사관 보안요원 아니랄까 봐서 이탈리아 아저씨는 친절하게 택시를 불러줬다.


소렌토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면서 긴장이 풀렸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갑은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도난당한 걸까? 만약 나폴리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한국영사관이 있는 로마까지 돌아와야 했겠지? 하필 휴일에 잃어버렸다면 어쩔 뻔한 거야? 외국에서 여권을 분실한 지 3시간 만에 임시여권을 만들었다는 건 그야말로 ‘빛의 속도’ 아닌가? 아내는 언제부터 저렇게 침착하고 대범해졌지? 하루가 저물었다.


소렌토 마지막 저녁 마실 중 아내가 잡화점 한 곳을 발견했다. 관광지답게 주인은 영어가 유창했고 무엇보다 친절했다. 집안에서 대대로 운영하는 가죽 공방 제품들이라면서 주인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디자인도 깔끔했고 가죽 상태도 좋았는데 가격도 무척 저렴했다. 아내는 60유로에 예쁜 녹색 핸드백을 주웠다. 나는 벨트와 지갑을 합쳐 50유로를 냈다. 헤어지면서 주인은 “혹시 내가 말이 너무 많았다면 미안하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아내는 유럽에서 처음 보는 매너라며 감동했다.

소렌토를 떠나 우리는 나폴리, 팔레르모, 파리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 초반부터 경제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나는 그야말로 아내에게 철저히 빌붙어 여행을 마쳤다. 돌아오자마자 주민센터, 구청, 운전면허시험장을 돌면서 주민등록증, 여권, 면허증을 새로 만들었다. 은행에서는 신용카드를 신청하면서 온라인뱅킹 보안카드를 새로 받았다. 2주 정도 지나자 소렌토에서 산 지갑은 모든 게 새것으로 채워졌다. 갑자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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