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iBA Apr 06. 2018

윈윈

지는 게 이기는 것 


"하, 또 여기다 차를 대놨네"

친구랑 점심 먹던 도중 전화를 받았는데 
다짜고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망원동 살 때의 일이다.  

"아니 또 여기다 차를 대놓으면 어떡합니까. 
당장 빼주세요. 우리 물건 내려야 돼요"

우리 집 건물 1층에 있는 에어컨 회사 사장의 전화였다. 어젯밤 룸메가 마지막으로 차를 썼는데 회사 앞을 조금 가리게 대놨나 보다.

"사장님, 그래도 그렇지 좋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막무가내로 빼라고 하면 됩니까. 그리고 지금 제가 밖에 있어서 당장은 힘듭니다"

그러자 전화 너머로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아니 우리 짐 내려야 하는데 당신 차가 막고 있잖아요"

상대가 언성을 올리니 나도 그만 화가 나버렸다. 평소에 거기다 차를 댔는지는 모르겠지만 권리는 전혀 없는 상황인데 당연하다는 듯 요구하는 게 못마땅했다.

"사정이 그런 건 알겠는데 좋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거기가 지정 주차공간인 것처럼 명령조로 차 빼라고 하시는 게 맞습니까?"

내가 오히려 따지고 들자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듯 당장 와서 차 빼라고 노발대발했다. 서로 씩씩거리며 한참 실랑이를 벌인 후 전화를 끊었고 결국 난 볼일 다 보고 밤늦게 집엘 들어갔다. 
아무리 따져봐도 내가 잘못한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맘속 깊은 곳에서 쓰린 즙이 올라왔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해도 큰 피해가 가는 일이 아닌 이상 늘 좋게 마무리 짓던 나였다. 서글서글 웃으며 상대 마음을 녹이는 게 내 가장 큰 무기이기도 했다. 과거의 나라면 필히,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멀리 나와서 밥 먹고 있는데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오늘만 좀 그 옆에서 일 보시면 안 될까요? 앞으로는 꼭 그 자리 피해서 대겠습니다, 사장님 하하하" 하며 자세를 낮췄을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몸을 숙여 상대가 더 이상 반박도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잔뜩 경직 되가지고는 '어떻게든 아저씨 잘못을 깨닫게 해주리라'는 태세로 맹공격을 퍼부운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lose lose. 최악의 결과였다. 괜히 나도 기분 잡치고 아저씨는 또 얼마나 화가 났을까.

'아 내가 너무 팍팍하게 살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한 발짝만 물러나면 둘 다 이길 수 있는 건데 그걸 못 참다니, 부끄러웠다. 여유 없이 바쁜 생활에 함몰되어 이 단순한 감정 게임의 법칙을 깜빡한 거다. 
'지면 이기는 것'

그날 이후 아저씨와 마주친 적 없이 미국에 와버렸지만, 이따금 나도 모르게 마음을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볼 때면 그 날 일이 떠오른다.

작가의 이전글 도전자 동진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