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an 20. 2024

'그분'이 우리 집에 계셨다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10

2엊그제 거실등을 바꿨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설치했던 커다란 유리등이니까, 10년 만이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를 와서 두리번거릴 때 발견한 막 오픈한 조명가게. 그 사장님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등을 골랐다. 눈에 많이 내리던 그날, 바로 물건을 챙겨 따라오시듯 작업을 시작해 주셨다.


그런데 예상 작업 시간이라던 30분은 훌쩍 넘겨, 3시간 가까이 흐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장님 옆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업무 통화를 하고 내내 보조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내가 더 안절부절 이었다. 작은 방에는 반려견 타닥이를 포함 온 식구들이 갇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간을 빼서 집에 잠깐 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린 이런저런 이유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지난 주말 이틀에 걸쳐 정말 혼신의 힘으로 미니멀을 대박 성공시킨 아내와 나. 아내는 무조건 꺼내고 나는 무조건 분리배출. 꼬박 이틀을 그렇게 하고 나니 10년 된 집이 휑해졌다. 지금 거실에는 벽면 하나를 다 채운 책장 하나, 화분 몇 개가 전부다. 우리 집이 이렇게 넓었나 싶어졌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게 이고 지고 사는 건데. 이번에는 다이어트 대박 성공하듯이, 요요 현상 없이 다 털어내겠다 다짐하면서.


그렇게 기분 좋게 텅 빈 거실이 어둑했지만 오랜만에 한눈에 들어왔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텅 비었는데 가득 찬듯한 기분 좋은 느낌, 그게 충만함이겠구나 하면서. 거실 가운데 사다리 위에서 작업하시는 사장님 주위를 서성거렸다. 마치 '구경하는 집' 구경하듯이. 그러다 거실과 주방을 구분 짓는 아치형 몰딩. 그 윗부분에서 까만 점처럼 보이는 게 마치 도장 찍혀 있듯이 붙어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까치발을 하고 한참을 올려다보니, '어 이거 그분 아닌가'


내 나이 스물 하나. 그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들었다. 그때는 병역의 의무를 성스럽게 채워나가고 있던 때. 다들 잘 아시겠지만 일요일 오전에는 종교 행사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해 활동을 해야 한다. 근무자가 아닌 이상 의무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자유다. 난 정말 자유롭게 법당에서 가고 교회도 갔다. 한주씩 번갈아서.


그렇게 법당을 갔던 어느 날. 우연하게도 그냥 봐도 반짝이는 용모에 우러러 보이는 스님(다들 큰스님, 큰스님 하고 불렀다)이 오신 날이었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을 텐데 기억에 남는 건 말씀이 아니라 이벤트였다. 그다음 주 일요일까지 '반야심경' 전문을 몽땅 외워서 낭송하는 병사한테 그 스님이 직접 그리신 '그분'의 걸개그림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그분'이 누군지도, 말씀의 의미도 몰랐던 그때. 사람도, 사람의 마음도 알 턱이 없던 스물 하나. '선물'이라는 말에 외웠다. 작업하면서, 근무서면서. 그다음 주 법회 시간. 아, 그런데 그 큰 스님이 오시지 않았다. 뭐지, 하고 속으로 홀로 실망을 하고 있는데, 지난주 그 옆에 큰 스님 옆에 있으시던 작은 스님(실제로는 그 스님이 훨씬 더 컸다)이 그러셨다. 큰스님이 내 주신 숙제를 한 병사 손 들어 보세요, 하고.


속으로 아싸, 하면서 냅다 일어난 나는 한방에 외웠다. 그때 많은 병사들 앞으로 나오게 해 내 키의 반만큼 주르륵 내려 펼쳐졌던 '그분'. 그 작은 스님은 그분 이름이 '달마'라고 알려 주셨다. 그렇게 그 후로 십여 년이 훌쩍 지나면서 차츰, 차츰 일상에서 나의 삶에서 몸으로 그분이 어떤 분인지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던 거였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때 의미 없이 외웠던 '반야심경'이라는 경 덕에 지금처럼 잘 살고 있지 싶다.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달마는 인도에서 왕에게 '바른말'을 했다가 국외로 추방된 인물이다. 평생 절을 짓고, 보시를 하고, 공양을 올린 황제 무제면전에서 '공덕이 없다'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데 참 성군이지 싶다. 사람하나 죽이는 건 예사롭던 그때 자기 눈앞에서만 사라져서 더 잘 되시기를 빌었으니. 그렇게 지금도 비행기로 12시간 넘게 걸리는 길을 걸어  정착한 후 그 유명한 <면벽수도>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게 바로 '일체유심조'.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라고 우리가 다짐하듯 자주 쓰는 그 말은 말이나 글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그 깨달음을 전하라는 의미이다. 기분 좋게는 '그 마음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의미일지도. 마음이 상했을 때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고 뇌까릴 때도 작동되는 의미일지도. 여하튼, 나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도 더듬어도 '그분'이 거기에 있게 된 장면이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이 집에 들어올 때 전체 도배를 하면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보다 내가 달마 족자를 받고 나서 그 족자를 어떻게 했나 싶었는데, 아 하는 기억이 불쑥 뛰쳐나왔다. 제대할 무렵, 새로 들어온 군종병을 알게 되었다. 군종병은 군에서 종교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역할을 하는 병사이다.


내가 병장 몇 개월 남겨놓지 않고 만난 그 군종병은 일병이었지만 딱 봐도 일병 같지 않게 생겼었다. 군복을 입으면 착시효과가 나긴 하지만 영락없이 아저씨였다. 물론, 군인들은 그냥 다 아저씨다. 군인 아저씨.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군종병은 진짜 아저씨였다. 얼굴에 나 나이 먹고 들어왔다, 가 쓰여 있는. 나중에 친해지면서 알게 되었다. 아기 아빠고, 사회에서 불교 단체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하다가 늦었다고.


그런데 친해진(아니 내가 혼자 먼저 친해지고 싶었던 형처럼 느꼈다) 이유가 우연히 부대 안에 하나밖에 없던 DDD 전화기 내 앞에서 가족과 그 군종병이 통화하는 걸 순서를 기다리면서 듣게 된 후였다. 참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빠였다. 그리움에 일분, 일초를 힘들어하는 신병이었다. 지금의 열여덟 따님이 몇 개월 되었을 때 새벽에 잠 못 들어 칭얼될때 가슴에 올려놓고 재우다 불현듯 떠오른 형이었다.    


아, 그래서 항상 눈빛이 불안했고, 피곤해 보였고, 걱정이 많았구나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보니 모든 게 다 그렇게 보였다. 족자의 주인공 '달마'대사께서 하시고 싶었던 그 말씀이 이거구나 싶었다. 눈에는. 괜히 말을 걸고 싶고, 챙겨주고 싶종교 활동이 끝나고도 눈치 보면서 뒷정리하는 군종병을 기다렸다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때는 내가 눈치를 안 봐도 될 때였던 지금에도 다행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달마 족자를 제대 마지막 종교 활동이 끝난 군종병한테 선물을 했다. 족자를 처음 군종병이 마치 '진품명품'에 출연해 감정을 보듯이 하던 장면이 지금도 또렷하다. 거기에 찍힌 낙관을 보면서. 이걸 직접 그린 스님이, 큰스님이 엄청 유명한 스님이시라고. 이런 가보가 만한 거라고. 이런걸 자기같은(?) 사람한테 주면 안되시는 거지 말입니다, 하면서. 그렇게 받겠다는 군종병, 아니 '그분'한테 드리고 제대를 했었다.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도 참 멋진 아빠로, 사람으로 어디선가 나와 같이 살아가고 있지 싶어 진다. 달마 대사가 일체유심조라는 깨달음을 얻은 수행 방법이 <면벽수행>이라고 한다. 그 군종병을 만나기 전까지 그 의미를 나는 동굴 속에서 벽을 쳐다보면서 하는 자기 수행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우유와 초코파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얌전하게 먹던 그 아저씨가 알려줬다. '자신이 벽이 된다'는 의미라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한 가지에 참을성을 갖고 끊임없이, 끊김 없이 전념하는 것이라고.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군종병 형님의 면벽수행에서 '참을성', '전념'이라는 단어는 불쑥불쑥 샘솟았다. 지금까지 아마도 수백, 수천번은. 그 한두 마디가 모여 실천이 되고, 그 실천이 내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 가 싶다. 누군가를 만나, 수없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진심을 주고받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도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가 보다. 진심이 통한 각자의 그분의 한마디에 회복되고, 다시 힘을 내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또 누군가에게 진심이 되고, 그분이 되는 릴레이를 이어가면서. 그걸 아마 우리 집 천장에서 '그분'은 계속 지켜보면서 잘한다, 잘한다 해주지 않으셨을까 싶어 진다. 이러는 동안 거실이, 온 세상이 환해졌다. 이전의 옅은 어둠이 단박에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다 더디지만, 서툴지만 끝까지 책임을 줘주고도 늦어서 미안하다며 만원을 깎아주신 조명하게 사장님 덕분에.

이전 09화 흘러 넘치지 않는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