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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25. 2024

동그라미를 기다리는 네모, 세모

[오늘도 나이쓰] 31

집 근처에 있는 두 가게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네모 분식집, 한 곳은 세모 코다리집. 메뉴 장르가 확연히 다른 두 집은 아주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싸면서 맛있고 푸짐합니다. 그런데 주인장들이 아주 친절하지 않아요. 아니, 적당히 안 친절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눈칫밥 먹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불편하기까지 한 곳들입니다.  


네모네는 우리가 이 동네에 이사 온 10년 전에도 있었으니 최소 10년은 넘었어요. 내 또래(보다 한두 살 위아래)인 듯한 남자 네모님이 홀로 운영 중이시죠. 네모님은 인사해도 대답을 하지 않는 건 기본입니다. 게다가 주문을 해도 말이 없어요. 다 얼마죠? 하고 물어야만  '얼마 요↘~'하면서 힘없이 내뱉아요. 그런데 그 끝에 마지못해하는 억양입니다.   


네모님은 손님과 (거의) 눈을 맞추지 않습니다. 주르륵 서너 명이 서 있었을 때에도 그러더군요. 얼른 올려다보고 후다닥 시선을 거두어 내립니다. 주문을 받는 동안에도 항상 순대를 뒤적이고, 떡볶이를 뒤집고, 튀김을 집게로 건져 털기만 합니다. 빠른 칼질과 손놀림이 대답을 대신하는 듯 하긴 해요. 마지막으로 음식 비닐봉지를 건네줄 때도 시선은 여전히 순대솥에서 올라오는 김 속에 가려져 있어요. 


세모네는 얼마 전에 오픈했습니다. 이제 서너 달 되었나 보네요. 그 사이 저는 세 번을 갔었나 봐요. 처음에는 아내, 따님과 같이. 다음 두 번은 따님과 저만. 코다리찜을 워낙 좋아라 하는 우리 셋이거든요. 처음 먹고 난 후 아내도 '맛있다'였는데 동시에 '이 집은 이제 땡'이라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아내의 맛집 기준 0순위는 언제나 '종업원이 친절한' 집이기 때문이었어요. 


세모네는 둘이 있습니다. 주방은 삼십 대 남자, 홀은 칠십 대 여자. 둘은 거의 대화가 없지만 느낌이 아들과 엄마 같아요. 세모네 높은 천장에는 수없는 엘이디 등이 빛나요. 등 자체가 새것이라는 느낌이 날 정도예요. 하지만 가게 분위기는 추적추적 비 내리는 하늘 같습니다. 세 번 모두 평일 오후 6시 무렵이었는데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어요. 그중 두 번은 우리가 다 먹고 나올 때까지도 손님이 들지 않더군요.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해주는 엄마는 표정이 세 번 다 화가 나 있었어요. '뭘 좀 더 주실 수 있을까요?'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말을 하는 저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더군요. 그런데 그 눈빛이 저마저 꽤나 불편하더군요. 눈가로 그어진 회색빛 아이라인이 입꼬리처럼 선명하게 쳐져 있어서 더욱 그런가 싶어 졌습니다. 그런데 인상이야 뭐 그럴 수 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말투조차 '뭘, 어쩌라고요?' 하는 듯했습니다. 


얼마 전 세 번째 갔을 때는 주방에 있던, 기다린 머리칼이 자그마한 두건밖으로 갈퀴처럼 죄다 삐져나온 아들마저 주방 안에서 몇 번을 '아이 씨'를 연발하더군요. 우리가 주문한 코다리 정식을 조리하면서 말이죠. 주방 기구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툭툭 치면서 딸그락 거리는 소리가 음식을 홀로 내주는 문턱을 가린 주름진 초록색 커튼을 흔들리게 할 정도였지 싶어요. 그때마다 따님이 눈빛으로 나를 보며 씰룩거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건 말이죠. 코다리 맛집을 여러 군데 다녀봤지만 정말 맛있다는 겁니다. 치명적일 정도로요. '이제 땡'이라고 했던 아내마저 맛은 좋다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거기에 쫀득한 코다리는 심지어 커요. 2인 정식이 2만 원인데요. 두 마리를 둘이 다 못 먹고 두 번이나 싸가지고 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더 의아해요. 사실은 지금도. 그런 표정과 그런 억양, 감정에 어떻게 푸짐하게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런데 있잖아요. 네모님과 세모님을 떠올리면, 네모님과 세모님이 만들어 내어 주는 음식을 느끼면서 류시화 작가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들려준 두 여성 이야기가 오버랩돼요. 그것도 아주 자주. 캐나다 북부 인근 마을. 두 여성은 매서운 겨울밤 각자 차를 몰고 집을 급하게 나섭니다. 한 명은 임신한 딸을 병원에 데려가야 했고, 다른 한 명은 아프신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죠.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눈폭풍을 뚫고 어둑한 도로를 한참 달렸습니다. 서로를 향해  말이죠. 그러나 얼마 못 가 멈춰 서야 했어요. 도로를 가로질러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요. 두 여성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길이와 굵기의 나무였어요. 마음이 급한 두 여성은 각자 난감해했습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요. 둘은 서로의 사정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어둑한 밤, 눈보라 속에서 말이죠. 잠시 뒤, 여성은 서로 각자의 차키만 교환해 목적지로 다시 달렸습니다. 


음식이 푸짐하고 맛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먹을 사람을 배려하는 거잖아요. 철저하게 먹을 사람 입장에서 만들고, 담아주는 거잖아요. 어릴 적 집 밥이 그렇잖아요. 엄마(또는 아빠)가 내어 주신 집밥은 엄마(또는 아빠)가 (회초리를 댄 다음에도, 내가 몰랐던 슬프고, 억울한 일 때문에도) 화가 나 있고, 인상을 쓰면서 목청을 높였어도 맛있었죠. 아주 맛있었죠. 오히려 슬쩍 반공기 더 퍼주고, 팬 바닥을 국물까지 긁어 더 담아내주셨지요.   


두 여성처럼 우리의 엄마도, 아빠도 네모나고 세모난 말 못 할 수많은 상황을 동글동글 지혜롭게 해결했거나 그 과정 중이었던 거겠지요. 두고두고 저라면 어찌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살다 보면 이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이 의외로 꽤나 많이 일어나니까요. 어쩌면 분식집의 네모님도 코다리집의 세모님들도 지금 자신과 '사정을 나누고' 차키를 교환할 동그라미를 찾아 헤매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다 모난 구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과 안에서 내뱉는 억양이 다르고, 즐겨 쓰는 말투가 다르고, 표정이 달라지는 게 그 예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네모님, 세모님이 오히려 저보다 더 솔직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걸지도 말이지요.  


이왕이면 친절한 게 좋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언제나 마냥 친절할 수는 없지요. 친절할 수 있는 에너지는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여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너부터 친절해라. 그러면 나도 친절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지 싶습니다. 이 말은 나부터 친절하면 손해라는 의미도 슬며시 담겨 있는 거지요.


깊은 산속. 계곡에서 만나는 돌보다 바닷가의 돌이 더 동글동글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에 뒤섞여 굴러 떨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깎아 버린 결과이지요.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히면서 말이에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들도 그러고 있는 중일 겁니다. 나처럼. 상류, 중류, 하류, 웅덩이 그 어디쯤에 어떤 형태로 머물러 있는지가 다 다를 뿐이겠지요. 뾰족한 세상, '우리'끼리라도 좀 동글동글해지자, 고 외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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