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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Mar 02. 2024

영웅으로 죽거나,
아니면 악당으로 살아남거나.

<듄 : 파트 2>


2021년의 <듄>이 흥미로웠던 점은, 매우 평범한 영웅 신화를 다루고 있음에도 중간 지점에서는 그를 반대로 꺾었다는 것이었다. 수백 수쳔여년에 걸쳐 설계되고 계획된 예언은 곧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또 영웅을 옭아맨다. 이집트와 그리스의 고대 신화들을 이후로, 영웅이 영웅으로서 거듭나는 데에는 언제나 운명의 부름이 필요했다. 그게 예언의 형태든, 핏줄의 형태이든. 헌데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는 참말로 특이한 영웅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계획된 자신의 혈통과 스파이스 덕에 미래 닥칠 운명을 예지해 본다. 그래서 그를 따른다. 그런데, 영화의 말미 그는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거부한다. 주어진 운명마저 자신이 쥐고 흔드는 폴 아트레이데스와 드니 빌뇌브의 야심찬 비전. 2021년의 <듄>은 그런 영화였다. 


멸문멸족, 몰락의 서사로 1편을 끝맺혔으니 이번 2편은 복수의 반등 서사다. 원작으로만 따지자면 프랭크 허버트의 해당 소설이 먼저이겠지만, 이미 영화계에서는 <늑대와 함께 춤을>이나 <아바타> 등으로 많이 변주된 바 있는 길을 <듄 : 파트 2> 역시 이어낸다. 온가족과 전병력을 잃은 폴은 아라키스의 토착민 프레멘의 세상에 융화되려 애쓰고, 그 과정에서 1편이 예고했듯 선지자이자 구원자로 변모한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의 선택과 변화. <듄 : 파트 2>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자신이 살아남고 원수인 하코넨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프레멘의 문화에 적응해 나가는 것은 폴 아트레이데스의 어쩔 수 없는 책무였을 테다. 하지만 그럼으로 인해 그는 리산 알 가입, 즉 프레멘이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외계로부터 당도한 구원자로 지명된다. 그렇게 구원자가 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면 좋은 거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폴은 얼마 전부터 미래를 봐왔다. 일약 구원자가 된 자신으로 인해 성전이 일어날 순간을. 그리고 대부분의 성전 상황 속 믿음의 주체들이 그러하듯, 그의 그 이후 향방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영향을 줄 것이다. 살아남아 쭉 이기게 되면 이기는대로 전화는 솟구칠 것이고, 혹여 죽고 패배하게 되면 또 패배하는대로 구원자를 잃은 신자들은 더 길길이 날뛸 것이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전 우주의 거대한 운명. 과연 폴 아트레이데스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1편의 자신만만하던 기조와는 다르게, 2편에 이르러 폴은 결국 그 운명에 다시금 복속된다. 정말로 구원자가 되고 싶어 그랬던 건 아니고,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선택지가 점점 더 좁혀진 상황. 그 상황 자체가 썩 그리스식 비극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여기에 심지어 그 상황을 만든 건 개개인을 역사의 한 부품으로 보고 우생학의 결과로써만 여긴 베네 게세리트,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제 3제국 독일을 떠올리게 하는 파시즘 왕국 하코넨. 이쯤되면 인류의 전 역사를 관통하려는 야심이 드니 빌뇌브와 원작에 있었던 건 아닌가 기쁜 의심을 해보게 된다. 게다가 챠니와 폴이 합심해 오니솝터를 격추시키는 장면에서는 중동 전쟁에서 소련측 무장헬기를 쉴새없이 겨눴던 무자헤딘들이 겹쳐보이기도 할 정도이니. 


보통 시작은 세상과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도덕적 의식이지만, 그 마지막엔 대부분 극도의 사익을 추구하는 등으로 변질되는 종교의 역사가 곧 무앗딥 폴 아트레이데스의 역사다. 크리스토퍼 놀란도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 입을 빌려 말하지 않았었나, "영웅으로 일찍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된 자신을 마주 보거나." 하코넨에게 복수하고 프레멘과 아라키스를 구원하겠단 폴의 마음은 적어도 아직까진 진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제국의 대가문들을 상대로 성전을 선포한 지금, 과연 그의 그 대의는 지속 가능할까? 언제 나올지 모를 드니 빌뇌브의 3편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이야기 외적으로는 드니 빌뇌브의 명백한 작가적 비전이 눈에 띈다. 어찌보면 조금 기념비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전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이 정도 규모는 아니었지 않은가. 심지어는 작가주의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비슷하게 평가되는 크리스토퍼 놀란 또한 이 정도로 관객들을 몰아붙여본 적이 없었다고 본다. 그나마 비견될 수 있을 만한 건 <테넷> 정도일 것 같은데, 그 영화와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열광하는 대중들의 상대적 비중을 훑어보면 아무래도 <듄> 시리즈의 압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정도로 드니 빌뇌브는 이 영화를 통해 대중과 투자자를 비롯한 할리우드 관계자들을 끝까지 몰아붙였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자기 식대로 해볼 테니, 맘에 든다면 한 번 끝까지 따라와 달라는 담대한 태도! <다크 나이트>나 <혹성탈출>, <매드 맥스> 같은 다른 작가주의 블록버스터들도 하다못해 적정한도의 스펙터클과 리듬으로 관객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와중인데 드니 빌뇌브는 그냥 자기만의 스펙터클과 리듬으로 관객들이 자신의 비위에 맞게끔 변화시켰다. 참으로 대단하다면 대단한 비전이라 할 수 밖에. 


<듄 : 파트 2> / 드니 빌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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