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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ul 19. 2024

그냥 이 볕뉘를 즐겨요

<퍼펙트 데이즈>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짐 자무시의 <패터슨>과 흡사 페어를 이룬다. 두 영화는 모두 평범해서 삶을 잔뜩 통달해버린 듯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며, 그 두 남자가 그저 하루하루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장면들을 연속해 반복적으로 이어붙임으로써 그들 못지 않게 스크린 바깥의 우리네 삶에도 영화가 깃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이 정도면 비록 <퍼펙트 데이즈>가 독일과 일본의 합작 영화라고는 하나, 어찌되었든 <패터슨>과 함께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각각의 대표로서 우리네 일상을 소중히 하잔 철학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다 할 만하다.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과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 둘이 대륙을 가로질러 펜팔 친구로 잘 지낸다 해도 나는 믿을 것이다. 


패터슨이 그랬던 것처럼, 히라야마 역시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스며드는 삶의 소중함을 느낀다.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 필이 반복되는 일상을 탈출해야만 하는 권태로 여겼다면(물론 그 심정 백 번 천 번 이해하지만), 히라야마에게 반복되는 일상이란 더없이 평안해 귀하게까지 여겨지는 선물이다. 자신에게 선물로 주어진 이 삶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며, 그 의무를 다하는 삶. 히라야마는 그렇게 시부야의 곳곳을 돌며 공중 화장실 청소에 열심이다.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일하는 것 같다가도 중간중간 던져진 짧디짧은 휴식 시간 안에서 또 나름의 예술들을 받아들인단 점에서 역시 히라야마는 패터슨과 동종이다. 패터슨이 스스로도 시를 쓰고, 또 그 주변에서 노래를 하거나 랩을 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예술이란 개념을 몸소 체험했던 것처럼 히라야마 또한 사진을 찍고 그 필름을 인화하는 과정 하나하나 모두를 느껴나간다. 거기에 중고 서점에서 산 책과 늘어질 때까지 듣는 카세트 테이프 속 음악들은 덤. 


필이 수다쟁이였던 것과는 달리, 히라야마는 굉장히 과묵한 성향으로 묘사된다. 그에게 주어진 대사라고 해봐야 영화 전체를 통틀어 채 몇 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같은 공백이, 관객으로서 그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엔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실제 우리네 삶에서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며 대놓고 개괄적으로 묻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잖나. 그처럼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에게 공란을 쥐어주고, 또 그를 과거회상이나 직접적인 대사 따위로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실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대충 보아하니 젊을 적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파문 아닌 파문을 당한 지식계층 출신의 장남 정도로 유추되던데, 설령 그게 아니라해도 별 상관 없고. 


우리네 일상의 소중함 말고도 느낀 것이 하나가 더 있다. 히라야마는 매일마다 정해진 새벽 시간에 눈을 뜨는데, 시계의 알람 소리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가 기상하는 데에 있어 의지하는 것은 시계나 스마트폰이 아닌 창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동네 할머니의 규칙적인 빗자루질 소리다. 히라야마는 매일 매일 정해진 새벽 시간마다 골목을 빗자루로 쓸어내리는 할머니 덕분에 온전히 잠에서 깰 수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록 그게 그 사람의 직업이니 설사 당연하다 해도, 그 후미진 골목길 안쪽에 있는 작은 자판기에 매일마다 캔 커피를 수급해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노고 역시 히라야마의 삶에 깊게 개입되어 있다. 어디 또 그 뿐인가. 매일 목욕탕을, 식당을, 술집을 열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히라야마는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해나가지 않는가. 


매번 말해왔지만,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깊숙히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세계 안에서 내 일과 네 일을 구분짓는 건 무의미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 빗자루질이, 내 오늘 업무가, 내가 만든 오늘의 음식이 다른 누군가의 하루에 필연적 부품으로 작동하는 세계. 서로의 성실함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이 세계다. 


반복되는 일상도 물론 지칠 수 있기 마련이다. 아마 그게 우리가 매번 휴가와 여행을 갈구하고 있는 이유이겠지.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이 일상도 그 휴가처럼, 그 여행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저 살아있기에 더없이 완벽한 우리의 나날들. 그냥 흘려보내지 말자. 지치고 힘들더라도, 매일 조금씩은 일상의 한 조각을 음미해보자. <퍼펙트 데이즈>는 마치 우리에게 그리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니까 그냥, 이 볕뉘를 우리 함께 즐겨봐요. 


<퍼펙트 데이즈> / 빔 벤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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