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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Aug 01. 2024

남성, 여성 모두에게 사려깊고 쿨한 영화

<파일럿>


젠더 체인지물, 특히 남성이 여성으로 변장하는 이야기란 점에서 <미세스 다웃파이어>나 <빅마마 하우스>가 많이 따라 언급되는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비슷한 건 더스틴 호프만이 여장을 했던 <투씨>다. 그 영화 주인공도 일 못 구하다 여장한 뒤 취직하고 승승장구 했었지. 그 점에서 <파일럿>은 여러 선배 영화들에 빚을 많이 졌다. 영화 속 대부분의 코미디들이 다 <투씨>나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봤음직하고, 한 명의 주연배우가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방식 또한 더스틴 호프만이나 로빈 윌리엄스가 이미 했던 것들이다. 헌데 그렇다고 해서 <파일럿>의 빛깔이 바랬단 이야기는 또 아니다. <파일럿>은 선배 영화들이 걸었던 길을 일견 그대로 걷는 듯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들에서는 자기만의 빛을 오롯히 발산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한국 영화로써 2024년에 개봉된다는 점 역시 중요하고. 


지난 2019년 한 해의 영화 결산을 하며, 김한결 감독의 <가장 보통의 연애>를 그해 가장 좋았던 영화들 중 하나로 꼽았던 적이 있다. 영화 자체가 품은 이야기나 메시지도 그 재미에 주효했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었던 것은 감독 특유의 쿨한 태도였었다. 한국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며 섹스나 전 연인 등을 소재로 하면서도 오히려 그걸 아무려면 어때-라는 태도로 쿨하게 받아쳤던 그 태도. 그게 참 좋았었는데, 김한결 감독의 그러한 태도는 차기작인 이번 <파일럿>에서도 온전히 드러나고야 만다. 물론 감독 혼자만의 결정은 아니었을 거고 그 옆의 제작자 등이 함께 동조해주고 끌어줬어야만 가능했을 태도지만, <파일럿>이 기착지로 거쳐가는 전개들엔 작금의 한국 영화 시장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의외성이 있었다.


예를 들면, 그렇게 했음 당연히 뻔하다고 욕은 먹었겠지만 난 정말로 영화 결말에 이르러 모든 진실을 고백한 주인공 정우가 그동안 속여온 슬기와 키스쯤은 할 줄 알았다. 마구 내달음질해 결국 도달한 상대에게, 가장 먼저로는 뺨을 맞았을지언정 그 직후엔 찐한 키스가 이어지겠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두 인물을 키스 시키지 않았고, 되려 끝까지 쿨한 태도로 두 인물 모두를 위해주며 끝냈다. 사랑보다, 주인공 정우와 슬기가 내내 말해온 '꿈'에 대해 좀 더 방점을 찍어주는 결말. 난 영화의 그 선택이 당연하다고 느꼈지만, 실상 그 선택을 이끌어내는데까지 제작 과정에서 꽤 많은 말들이 오갔을 거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키스는 해줘야지 않겠냐-는 의견들이 분명 있었을 것 같아. 하지만 <파일럿>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그 덕분에 오히려 쿨한 영화가 됐다. 에필로그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정우와 슬기가 가볍게 인사하는 정도만으로도 영화의 감흥은 충분했다. 


젠더 체인지물로써 당연히 건드릴 수밖에 없게 되는 주제들에 대해서도 영민하게 대처했다고 본다. 남성이 여성으로 행세하며, 여자들 삶속 고통을 역지사지로 이해하게 된다는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당연히 영화엔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잘했다고 여겨진다. 비록 소악당으로 묘사되기는 하나, 극중 신승호가 연기한 현석이나 아니면 주인공 정우의 대사 또는 상황들로 남성들의 입장 역시 충분히 대변된다고 생각한다. 능력 위주가 아니라 젠더 쿼터에 걸려 일자리를 잃거나 인정받지 못한 남성들. 그들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또 여성들의 입장 또한 어느정도는 잘 대변했다. 물론 내가 남자라 여자들 입장에서 이 영화가 그걸 얼마만큼 잘 해냈는지까진 잘 모른다. 여성 관객들 중에서 이 정도론 아직 부족하단 생각을 하는 비율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그치만 남자인 내가 봤을 때, 여성들의 고충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단 점에서는 그래도 작게나마 미덕이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로 좋다. 조정석은 말그대로 영화를 이끈다. 현실성이 아주 충만하다고 볼 순 없겠지만, 여성으로 변장했을 때의 모습 또한 코미디란 걸로 한 수 접고 들어가면 충분히 그래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반 재미없었을 수 있던 장면들을 배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며 끝끝내 관객들을 납득시켜버렸단 점에서 주연배우로서의 자질이 돋보인다. 여기에 한선화나 신승호 등의 배우들 연기도 좋은데,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이주명과 서재희. 이주명은 특유의 맑은 얼굴과 연기로 해당 역할에 생기를 더해낸 것 같고, 특히 서재희는 진짜 뻔한 악당임에도 연기를 너무 맛깔나게 해 그 자체로 보는 맛이 있었다. 배우들이 오로지 연기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영화. 이런 영화를 한국에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뻔해 아쉬운 부분들도 널렸다. 남성이 여성으로 변장하는 영화란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거쳐가야 했던 유머이긴 하겠지만, 주인공이 여성 속옷 가게에서 당황해하는 장면이라든가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때문에 정체가 탄로날 뻔한 장면이라든가 등은 뻔하긴 뻔하더라. 여기에 소악당 현석의 활용도 등도 너무 아쉽고. 하지만 그럼에도, <파일럿>은 배우들의 연기로 충분히 재밌게 즐길 만한 젠더 체인지물이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사려깊으면서도 쿨한 영화처럼 느껴졌다는 데에 있어, 그 의미가 더 충분한 것 같고. <가장 보통의 연애>에 이어, 이번에도 안타를 쳐낸 김한결. 이제는 차기작이 나오면 항상 챙겨보는 감독이 될 것 같다. 


<파일럿> / 김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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