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라>
재판장은 옳은 놈, 그른 놈 가리는 곳이 아니라 이긴 놈, 지는 놈 가리는 곳이라 말하고 다니던 속물 변호사 인후. 그런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이들 중 하나였던 태주를 변호하게 된다. 당연히 인후가 그의 변호를 맡게 된 경위는 이 사건의 규모와 유명세 때문. 다른 것도 아니고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이니, 여기서 이기기만 한다면야 변호사로서 자신의 이름값이 단박에 상한가 치는 건 당연지사일 터. 하지만 교묘한 법리로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만 같던 이 건수엔 의외의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의뢰인 태주의 태도. 시해범들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인 그가 하필 명분을 따지는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던 것. 태주가 조금만 거짓말에 협조해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융통성없는 양반이라더니 군인으로서 절대 거짓말은 할 수 없다 말하고 있다. 과연 인후는 태주를 제대로 변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건수로 자신의 이름을 높이 드날릴 수 있을까?
<서울의 봄> 이후 개봉되는 작품이라 제작진들 입장에서는 조금 곤혹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서울의 봄>의 개봉과 그 엄청난 흥행 직후 개봉하게 된 <행복의 나라> 사이 구도가 나쁘지 않다 느껴졌다. <서울의 봄>은 의도치 않게도, <행복의 나라>의 프리퀄이자 스핀오프로써 기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천만 명 이상되는 관객들이 <서울의 봄>을 통해서 이미 12.12 사태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 시점에서 개봉되는 <행복의 나라>는 관객들의 이해도 측면에서 오히려 덕을 봤다고 생각한다. 물론 <행복의 나라>는 12.12 사태를 배경 정도로만 쓰고 있고, 그보다는 인후와 태주의 재판에 좀 더 집중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더더욱 그렇기에 <서울의 봄>의 흥행은 더 도움이 된다. 핵심이 아니고 양념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12.12 사태 묘사를, 이미 <서울의 봄>이 잘 해주지 않았나. 나조차도 <서울의 봄>을 보지 않고 <행복의 나라>를 바로 감상했더라면 이해가 잘 안 됐을 것 같다.
얼마 전 <파일럿>을 통해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였던 조정석이, <행복의 나라>에서는 적당히 진지한 연기와 적당히 가벼운 연기 사이를 오가며 자칫 실제 역사의 무게감에 짓눌려 마냥 무거워질 수도 있었던 영화에 일말의 숨통을 틔워준다. 또, <서울의 봄>에서는 전두광이라는 번안된 이름을 통해 전두환을 연기했던 황정민. 거기서의 황정민은 전두환을 연기함에 있어 기회주의자이면서도 언제고 끓어올라 터져버릴 수 있었던 인물로서 산화됐었다. 반면 <행복의 나라>에서 전상두란 이름으로 전두환을 연기한 유재명은 똑같은 기회주의자이면서도 그 안에 일종의 삐뚤어진 울분과 야망을 잔뜩 품고 있는 인물로서 표현된다. 황정민의 전두광이 좀 더 파워풀한 전두환이었다면, 유재명의 전상두는 좀 더 차분하되 그래서 더 음흉해보이는 전두환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둘 다 마음에 든다. 전두환이 맘에 든다는 건 아니고.
하지만 어쩔 수 없게도, <행복의 나라>를 보며 이선균에 집중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얼마 전의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에 이어 다시금 찾아온, 그리고 정말 최후의 유작. 이선균의 이름으로 만나볼 수 있는 작품들 중 앞으로 영원히 최신의 영화로 남을 <행복의 나라>. 그 안의 이선균을 보며 나는 마음이 쓰릴 수밖에. 하필 이 영화에서 그의 역할도 의미심장했다. 조정석이 연기한 주인공이 이를 악물고 끝까지 지켜내려 하는 인물. 그리고 태주 그 자신으로서는 강직하고 자기평가에 있어 엄격했던 인물. 그런 인물을, 얼마 전 작고했던 이선균의 얼굴로 보는 것은 실로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보는내내 괜시리 눈이 아리고 그가 그리워져 혼났다.
끝까지 관객을 매혹시킬 결정적 구석은 끝내 제공해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행복의 나라>는 크게 모난 곳 없이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다 떠나서, 이선균의 정말 마지막 유작으로써 그 중후함을 스스로 더해내는 작품이기도 하고. 작품내내 거의 말없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있었던 이선균 얼굴의 태주가, 영화 후반부 어느 순간 눈을 올려 뜨고 마치 카메라와 마주하는 것 같은 순간에 나는 마음이 가장 많이 아렸던 것 같다. 이 영화 제목의 모티프가 된 동명의 가요가 노래하고 있듯, 부디 그가 고개를 들고 눈을 떠 행복의 나라로 떠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