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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Sep 27. 2024

몸부림, 춤사위

<룩 백>


입학했던 것도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영화 전공으로 예술대학에 다녔던 시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한다며 참으로 기뻤던 동시에, 또 아직 20대 중후반들이면서 벌써 자신만의 스타일을 견고하게 다져놓은 다른 선배 및 후배 학우들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심으로 충만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업계가 다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체육계나 예술계만큼 상대와 나 사이의 그 실력차가 그토록 특히 가시적인 곳이 또 없다. 선배들의 괴물같은 작품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었지, 아- 나는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그나마 선배들은 차라리 좀 낫다. 내 뒤를 따라오던 후배들이 괴물같은 작품들을 만들었을 때보다야. 그 때의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었지, 아- 나는 그동안 대체 무얼 해온 것인가. 


<룩 백>은 학교 학보에 실리는 4컷 만화로 말미암아 서로간에 좋은 라이벌이자 동료가 되어준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나름의 만화 실력으로 은근 으스대고 있던 후지노. 그러나 얼굴도 모르는 히키코모리 후배 쿄모토가 그린 4컷 만화를 보곤 그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열이 뻗친다. 나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포기했을 것 같은데, 후지노는 오히려 칼을 갈아 반드시 쿄모토를 따라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향후 일년의 포문을 연다.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사이 친구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학업 성적도 조금씩 뒤쳐져간다. 그래도 이 정도로 일년 했으니, 쿄모토만 이긴다면야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그럼 그 일년간 쿄모토는 그냥 놀고 있나? 당연히 쿄모토도 나름의 절차탁마를 했겠지. 그 사이 더 높아진 쿄모토의 수준, 그에 후지노는 결국 선언하고야 만다. "나 안 해."


물론 <룩 백>은 후반부에 이르러 더 풍부한 이야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낸다. 후지노와 쿄모토 두 친구 사이의 수어지교와 그 두 만화가 사이의 교학상장. 그리고 이어지는 비극. 하지만 그 안타까움에 시간선까지 거슬러 올라가 끝끝내 행하는 구원과 그로인한 위로까지. 여러모로 <룩 백>은 대다수의 관객들, 특히 그중에서도 예술계 등에서의 경험을 갖고 있는 관객들에게 더 깊은 공감과 향수 그리고 애환을 불러일으킨다. 그 정도로 <룩 백>의 후반부는 정말이지 멋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내게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쿄모토와의 첫 만남 이후 집으로 돌아가던 후지노의 발걸음이었다. 평생의 숙적이라 생각했던 상대가, 오히려 나의 작품을 응원해주고 다 기억하는 팬이었던 건에 대하여. 그런 쿄모토의 앞에서는 짐짓 쿨해보이고 점잖아보였던 후지노인데, 막상 집으로 혼자 돌아가는 길엔 그 은근한 흥이 부글부글 끓어넘치다 결국 주체 못할 정도로까지 흘러나와 하나의 춤사위로 이어진다. 그렇게 후지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춤을 췄다. 사실 춤이라기엔 일종의 몸부림에 더 가까워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까지 맞아가며 하늘로 곧 승천하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흔들어대던 후지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룩 백>은 예술을 통해 만나 서로를 응원하는 예술가와 독자 또는 관객 사이까지 어루만지고 있는 영화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룩 백>을 보며 김춘수의 시를 떠올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후 이름을 불러주니 그제서야 그가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시구. 어쩌면 예술가와 소비자의 관계도 바로 그렇다. 투박하고 힘겹고 구질구질하기만 한 예술가들의 몸부림은, 그 작품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또 그에 감동해주는 소비자를 만나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춤사위가 된다. 나의 몸부림이 당신에게 이르러 춤사위가 되었을 때. <룩 백>은 여느 예술가들이라면 꼭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그 기묘한 윤회에 대해서 설파하는 영화다.


스스로 떠벌리는 자랑 같아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내가 대학 시절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영화를 두고 학번 차이 꽤 많이 나는 후배가 말을 건 적이 있었다. 자기는 그 영화가 너무너무 재밌고 좋았노라고. 아-,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겐 따라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등이 되고 있었을까. 그저 우연히 만나 잠깐의 대화 끝에 헤어진 그 후배였지만, 그 후배의 그 말 덕분에 나는 그 날 하루종일 마음 속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룩 백> / 오시야마 키요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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