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과 하퍼>
코로나19로 인한 영화업계의 불황에서 할리우드가 이제 막 빠져나오던 시기, 유명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윌 페럴은 한때 SNL 작가로 오랜 기간 함께 합을 맞추며 친구로 지낸 남사친 앤드류 스틸에게 한 통의 연락을 받는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자주 보지 못하고 연락도 잠깐 뜸했던 사이, 앤드류가 여성으로서의 자아에 이제라도 확신을 갖게 되어 이미 성 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는 이름도 앤드류 스틸이 아닌 하퍼 스틸을 사용할 거라는 것. 조금이라도 당황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 그래도 윌은 오랜 친구의 새 이름과 그 정체성에 곧바로 긍정하고 여사친이 된 하퍼 스틸과 함께 로드 트립을 떠난다.
<윌과 하퍼>는 다큐멘터리 로드 무비로써 제목답게 윌과 하퍼의 여정을 뒤따라간다. 참고로 극중 인터뷰에 따르면 하퍼는 예전 남성일 적 홀로 자동차에 올라 미국 곳곳을 여행하길 즐겼었다고. 그러나 여성이 된 이후부터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어 앞으로 혼자하는 그런 여행은 힘들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고. 바로 그래서 이 여행은 계획된다. 윌과 함께하는 하퍼의 추억 여행. 더불어 여자로서 짐짓 도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 여행에 성공하게 된다면, 하퍼 본인도 성취감과 자아 실현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역시 가장 멋져보였던 건 윌과 하퍼의 관계였다. 꼭 누군가의 성 전환 수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 인생 속 여러 관계들에서 갖가지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 절친한 친구였으나 누군가의 연애와 결혼으로 인해 다소 소원해지는 관계, 아니면 경제적인 수준 차이가 생겨남에 따라 은연 중 갈라지게 되는 관계 등등. 꼭 친구 관계에만 국한될 필요도 없지. 연인 관계든 가족 관계든 회사 동료 관계든 세상 그 어떤 관계든 간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엔 다 변화를 맞이하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 윌과 하퍼의 관계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달라지는 것은 있으나 변하지는 않는 관계의 현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서로를 향하는 마음일 뿐이니. 물론 속세에선 현실적으로 그게 쉽지 않음을 알지만, 어디 마냥 쉽다면 그게 감동이겠는가. 어렵고 쉽지 않지만 끝내 해냈다는 게 감동인 거지.
극중 윌과 하퍼 둘 다 느끼는 것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뭉클한 부분도 있었다. 과거부터 특히 차별이 심했던 남부 지역 오클라호마, 그 곳의 펍에 홀로 들어선 하퍼. 어째 그녀를 쳐다보는 펍 안 사람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선입견이 만든 착각이었을 뿐, 영화는 이어서의 묘사로 그 펍 안의 사람들이 하퍼에게 얼마나 호의적으로 구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인이 아님에도 남부 지역은 보수적이고 꽉 막혀있을 테니 분명 하퍼를 힐난하는 사람들이 나오겠구만-이라 생각하며 보고 있던 나에겐 이게 잔잔한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물론 트랜스젠더를 포함해 성 소수자, 그 밖의 다른 모든 소수자들이 여전히 힘든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는 게 현실이란 걸 안다. 세상이 아직은 그렇게까지 너그롭지 않다는 것 역시 안다. 하지만 그 펍 장면은 괜시리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말을 내 머릿속에 떠오르게끔 만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연히 그 지역 사람들 중 꽉 막힌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 그치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트랜스젠더가 아님에도 이상한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저마다 다 힘들게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부자든 빈민이든, 성인이든 미성년자든, 남자든 여자든, 스트레이트든 퀴어든, 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힘겹게 각자의 전투 최전선에서 싸워나가고 있다. 그토록 고된, 전쟁 같은 일상. 그러나 내가 힘든 만큼 저 사람도 힘들 구나-라는 깨달음은 이상한 공감의 위안을 준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말. 그 어떤 오해나 곡해없이, 나는 정말로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서로가 서로를 끝까지 부여잡은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