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희귀한 장애와 일평생 싸우다 끝끝내 영면하게 된 젊은 마츠. 그를 잃은 부모와 여동생은 슬픔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 웬 RPG 게임 유저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받는다. 생전의 이벨린은 함께할 수 있어 그저 기쁘고 영광인 친구였다 말하는 그들. 근데 대체 이벨린이 누군데? 그리고 우리 아들은 생전 앓던 장애 때문에 집밖으로 제대로 나가본 적도 없는 아이인데, 이렇게 많은 친구들은 대체 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람?
RPG, 롤플레잉 게임. 저마다 스스로가 정했거나 또는 부여받은 역할을 최대한 충실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목표인 게임. 마츠는 수월하게 플레이하기 어려운 장애를 가졌음에도 생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탐닉해왔다. 하필 그 RPG 게임에서 마츠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직업은 탐정이었고, 이벨린이란 이름을 통해 그간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사연을 들어주며 물심양면으로 조언해 사건들을 해결해주고 있었던 것. 그렇게 그 안에서 사귄 수많은 친구들. 그들은 비디오 게임내에서 이벨린의 장례식을 주도하는 걸 넘어, 결국 모니터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 이벨린의 본체라 할 수 있을 마츠의 진짜 장례식에도 초대받게 된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장애와 병의 고통을 뛰어넘는 인간의 유희 정신에 대해 찬미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토록 비디오 게임이란 얼마나 유익한 것이냐-는 태도로 일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외에도 온라인 친구가 오프라인 친구 못지 않다는 이야기 역시 가능할 것. 물론 그 모든 주제들은 다 한 번쯤 이야기 나눠볼 만한 것들임에 진배없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주 많이 다른 이야기는 아니고, 아주 조금 다른 이야기.
우리는 언제나 각기다른 형태의 예술 속에서 신비하고 흥미를 끄는 이야기들에 탐닉해왔다. 우리는 신화 속 이야기들을 즐겼고, 그것은 곧 책과 영화 등의 형태로 모습을 바꿔 인간사에 영향을 드리워왔다. 그런 상황이었다 보니, 우리는 우리들의 실제 인생 속 이야기들보다 그런 예술 작품들 속 이야기들이 훨씬 더 강력하고 재미있는 것이란 헤게모니 안에 언젠가부터 조금씩 시나브로 갇혀갔다. 그랬으니까 그런 감탄도 가능했던 거지, "진짜 영화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역시 예술 작품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을 비디오 게임 이야기,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을 보며 나는 그같은 전제를 적어도 가끔씩은 뒤집어도 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인류사에 있어서 이야기보다 훨씬 더 먼저 탄생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존재한 이후에야, 이야기 역시 구전될 수 있었다. 이런 전제 하에서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우리가 예술 작품이 들려줄 이야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예술 작품들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단 걸 알려주는 작품이다. 우리가 신작 소설과 신작 영화, 신작 비디오 게임 출시를 고대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그것들 역시 실제 삶속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츠와 이벨린의 비범한 이야기 덕분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라는 비디오 게임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다시 한 번 입증할 수 있었고, 덩달아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도 함께 나올 수 있었다. 가끔, 정말 아주 가끔씩. 우리네 삶은 소설과 영화와 게임의 이야기를 그렇게 이긴다. 예술은 붓과 카메라, 컴퓨터 등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결국엔 언제나 우리 인간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