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스파이더맨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매체들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성장 드라마였고, 여기에 '이번엔 진짜 애다'를 천명한 MCU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성장 드라마. 성장 드라마는 아이 또는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아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장르의 구분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어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때야 하며, 또 어떻게 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의 MCU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반면교사 삼을 수 있는 '미숙한 어른'과 '옳지 못한 어른', 또는 '나쁜 어른'들을 상정해 보여주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았다. 벌처는 아이를 협박하는 어른이었고 쇼커는 아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어른이었으며, 미스테리오는 아이를 속여먹는 어른이었다. 어디 악당들만 그랬으랴. 피터의 스폰서인 토니는 무책임한 어른의 전형이었고, 해피는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어른이었으며, 심지어 닉 퓨리는 아이에게 소리치르며 책임을 강요하는 어른이기도 했다.
이런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는 동안, 우리의 어린 피터는 성장 했을까? 좋은 어른이 될 가능성이 움텄을까? 마블은 3편인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 이르러서야 이야기하는 듯 하다. 이 아이는 언제나 좋은 아이였고, 또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이번에도 피터를 괴롭히는 것은 어른들이다. 자기를 속여먹은 어른, 미스테리오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스노우볼이 되어 피터를 옥죈다. 아이를 대상으로 설교를 넘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는 어른, J 조나 제임슨이 있고 여기에 학교 선생님들 역시 피터를 모른체 넘어가주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닥터 스트레인지 역시 마찬가지지. 비록 주문 시전 도중 정신 사납게해 그걸 망친 건 피터가 맞지만, 어쨌거나 그는 아직 어린 아이 아닌가. 게다가 평범한 그 나이대 소년이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엄청난 사건을 방금 겪은. 그럼에도 스트레인지는 모든 탓을 어린 피터에게 넘기고 윽박 지르며 시키는대로 하라 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더 못된 어른들의 향연. 각기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일렉트로와 샌드맨, 리자드, 닥터 옥, 그리고 그린 고블린 연합은 로얄럼블 이벤트하듯 피터를 몰아세우고 겁박하기에 이른다.
이 엄청난 사건을 해결하는데에 있어, 스크린 속 어른들과 스크린 밖 어른들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저 악당들을 죄다 잡아 묶은 뒤 박스 안에 봉인된 주문을 통해 다시 다른 차원으로 돌려보내버리자! 저들이 각자의 차원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든 말든 무슨 상관? 당장 우리 차원의 일이 급한데. 스크린 밖에 앉아 영화를 보던 나 역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게 무조건적으로 나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쁜 생각'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현실적으로 계산해, 조금 더 최고의 결과를 얻으려는 것. 하지만 어린 아이인 우리의 피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터는 그들 모두를 치료하고 갱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단순히 우리 차원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죽이게 놔두지는 않겠단 태도. 그 역시 마냥 '좋은 생각'이라기 보다는,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옳다고 믿는 것을 밀어붙여 조금 더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는 것. 참으로 아이같은 이상적 생각이지? 하지만 그 생각과 태도가 피터를 정의하고, 그렇게 스파이더맨은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에서 우리들의 위대한 이웃으로 변화해 나간다. 스폰 해준 건 토니인데, 어째 정작 영향을 더 준 건 스티브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자라면서 경험했듯, 이상적인 생각과 태도가 언제나 성공적인 결과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피터는 처절하게 깨지고 쓰러진다. 하나뿐인 가족 숙모를 잃고, 친구들을 위기에 빠뜨린다. 그러면서 배운다. 사소한 선택이 불러일으킬 거대한 결과에 납득하는 것. 분노해야할 때와 용서해야할 때를 구분하는 것. 그리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 배운다는 것은 곧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어린 피터는 성장 해나간다. 다행인 건, 혼자서 얻은 깨달음도 있지만 그런 그를 옆에서 도와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좋은 어른 아니, 어쩌면 '미래의 좋은 나'인가?
그를 지지해주는 건 다른 차원의 피터 파커와 또다른 차원의 피터 파커다. 그들의 조언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피터 파커'이기 때문에 더 힘을 얻는다. 나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잘 이해해줄 사람은 우습게도 '나'뿐이다. '나'가 '나'에게 공감하는 데에는 긴 대화나 별다른 소통이 필요 없지 않은가. 내가 겪었던 걸 너도 겪었구나. 우린 모두 똑같은 존재들이구나. 단순하지만 바로 그 점이, 세 피터 파커를 위로하고 또 달랜다.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거, 그거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잖아.
더불어 좋은 것은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 별개의 이전 시리즈들에게도 나름의 서사적 결말을 선사 했다는 데에 있다. <노 웨이 홈>은 토비 맥과이어의 오리지널 시리즈에 썩 괜찮은 에필로그를 부여 해준다. 본편 말고 쿠키 영상에라도 커스틴 던스트의 MJ가 등장해 피터와 알콩달콩한 결혼 생활을 보여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거나 토비의 피터는 그녀와 잘 살고 있음이 암시된다.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흐름 탓에 다소 핼쑥해진 그의 모습은 언제나 안에 껴입고 다니는 스파이더맨 수트와 결부되어, 다른 차원에선 아직까지도 성실하게 스파이더맨으로서 살아가고 있음이 슬쩍 엿보이는지라 괜시리 기뻐진다. 여기에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은 또 어떻고. 물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가 남긴 시니스터 식스 등의 떡밥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앤드류 가필드의 얼굴을 한 피터 파커 후일담이 <노 웨이 홈>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점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팬들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명의 피터 파커 배우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악당 배우들의 존재. 윌렘 데포는 여전히 가면보다 실제 얼굴이 더 공포스럽고, 여기에 오리지널 시리즈에서는 채 보여주지 못했던 과학자적 면모와 불쌍한 면모를 확장판스럽게 더 잘 보여준다. 직접 스턴트 했다는 격투 액션은 덤. 오리지널 <스파이더맨>에서 아쉬웠던 게 그린 고블린의 격투 액션이었거든. 글라이더를 통한 공중 액션이나 추격씬은 많이 봤었는데, 스파이더맨과 이토록 무섭게 서로 치고받은 건 처음 보는 거라... 알프레드 몰리나는 특유의 선한 인상을 다시 한 번 보여주어 반가웠고, 원래 자신이 있던 차원보다 훨씬 더 멋지게 리뉴얼된 제이미 폭스의 일렉트로는 왜 그가 MCU 차원에 남고 싶어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좋은 쪽으로 우스웠다. 하지만 진짜 예상 못했던 건 샌드맨의 토마스 헤이든 처치와 리자드의 리스 이판. 두 캐릭터는 결말 직전까지 풀 CGI 캐릭터로만 등장해 직접 나올 거라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떡하니 등장. 아, 이 영화는 정말로 팬들을 위한 선물 상자가 맞구나.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는 영화다. 런닝타임이 좀 길지 않나 싶고, 나름 다 무시무시한 악당들인데 마치 친구 집 놀러가듯이 피터 따라 해피네 빌라 걸어들어가는 장면은 유치하고 좀 깼다. 하지만 그외의 다른 부분들 장점이 너무 커서 그 단점들이 잘 가려지는 모양새. 특히나 결말이 무척이나 좋은데, '아이언맨 키드' 정도로 격하되던 스파이더맨이 정말로 우리가 아는 그 스파이더맨으로 돌아온 것 같아 행복했다. 그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입니다-라는 느낌이라. 첫 등장했던 <시빌 워>부터 시작해 벌써 대여섯 편의 영화를 통해 보았던 부잣집 도련님 느낌 스파이더맨? 이런 스파이더맨도 있으니 맛 보세요~라고 했던 마블이 다음 편부터는 더 오리지널한 테이스트의 스파이더맨으로 찾아올 거라 선언하는 것 같았다.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마지막 감흥 역시 훌륭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다소 계획된 감이 있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어느 정도 가시적이었다는 거지. 2008년 <아이언맨>부터 셋팅 시작해 이후 여러 편의 영화들을 거쳐 <인피니티 워>에서부터 그 어셈블 장면의 싹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번 <노 웨이 홈>의 스파이더맨X3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종류의 기쁨이었다. 설마?하다가 진짜!하며 얻어맞은 느낌. 근데 그 기습공격이 너무 즐거웠다. 돌이켜보니,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을 극장에서 처음 보았던 게 2002년으로 나 초등학생이었을 때다. 단관 극장에서 보았던 그 영화의 티켓을 나는 아직도 갖고 있다. 언제나 말했듯, 추억은 힘이 세지 않나.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은 그런 추억에 젖어 사는 팬들을 어르고, 달래고, 보듬고, 또 껴안을 줄 아는 팬 무비다. 영화를 보는동안 그냥 행복했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