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홀든은 INFP?
<호밀밭의 파수꾼>은 왜 명작인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때 난 홀든이 별로였다. 기회마다 타인의 위선을 깨알같이 짚어내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재능에, 대부분의 악감정을 욕설 같은 것으로나 대체하는 비루한 표현력. 그런 그의 넋두리를 3일의 생활 동안이나 감내해야 함은 꽤 고역이었다. 독후감 잘 써서 내신 관리 해보려 읽었다. 하지만 그때 난 고등학생이었다, 인생이라는 옷에 흙이나 먼지를 묻히지 않으려 조심조심 걷던.
홀든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고등학생이다.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에서 낙제를 받았고, 벌써 네 번째 학교에서 퇴학당하는 중이며, 괴롭힘 당하던 급우의 자살을 보았고,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경험했고, 자주 우울해지는 증상을 겪으며, 가까운 친구도 한 명 없다. 학기가 끝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 3일의 시간 동안 그는 혼자 뉴욕으로 떠나기로 한다.
홀든의 일정에 세세한 계획 같은 건 없다. 다만, 그 순간의 선택지 중에 고를 뿐이다. 처음부터 뉴욕 갈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퇴학을 당했으니 학교를 떠나야 하지만, 학기가 끝나기 전까진 기숙사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다만 룸메이트와 유혈 다툼이 나는 바람에 짐을 싸서 바로 나와버리는 편을 택한다. 그리고 조기 귀가를 하면 부모님에게 사정을 들키니, 잠시 호텔에서 지내보기로 한다. 뉴욕으로 이동해서 술집, 클럽 등 그때그때 내키는 곳을 전전한다. 눈앞에 선택지가 펼쳐지기 전까진 선택을 보류하는 P처럼.
기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한 홀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하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혼자 택시를 탄다. 택시에서 홀든은 왠지 센트럴파크의 오리들이 생각난다. 오리를 보고 '하얀 오리들이 물에 떠다니네. 화려한 놈은 수놈인가 보네' 생각하는 쪽이 S, '세찬 발장구를 치며 어딜 가는 길일까', '날씨가 추운데, 젖은 털옷은 괜찮을까' 생각하는 쪽이 N이라면, 홀든은 후자를 증명한다. N의 생각은 그렇게 느닷없이 메타포를 생성해 낼 때가 있기에.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택시 기사는 홀든이 자신을 놀리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한다. 택시 기사는 심통 난 전자였을지도 모른다.
호텔에 도착한다. 할 일 없이 담배 피우며 앉아 있다가 예전에 우연히 알게 된 번호에 전화를 걸어본다. 벌레스크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자의 번호. 그 여자는 자다 깨서인지 갑작스런 전화에 조금 날카로운 반응을 하려다가 홀든에게 내일 만나는 것을 제안한다. 홀든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약속도 잡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호텔의 바와 재즈 클럽을 가보지만, 전에 사랑했던 제인 생각만 날뿐, 함께 어울릴 여자를 찾긴 힘들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잘 섞는다고, 혼자 새로운 곳에 잘 간다고 E일 순 없다.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I인 홀든은 그들의 가식에 염증만 느낄 뿐이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김에, 조금 실수도 하게 된 것. 호텔로 돌아온 홀든에게 엘리베이터 보이가 제안을 한다. "혹시, 재미 좀 보실 생각 있어요? 잠깐 할 거면 5달러면 되고, 하룻밤은 15달러 주면 된다"는 그의 말에, 홀든이 동의한다.
이 일은 내가 정한 원칙에는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때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것 말이다.
홀든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선호가 뚜렷한 F다. 그가 세상을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내면의 가치관을 닻 삼아, 감정 주관이라는 돛으로 항해한다. 매춘은 그의 가치관에 맞지 않았지만, 우울해서 매춘부를 불렀고, 곧 앳되게 생긴 여자 아이가 등장해 옷을 벗으려 하자 홀든은 이 광경에 더욱 우울해질 뿐, 그녀와 무언갈 할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허리 수술을 했다는 핑계를 대고 5불을 준다. 그러자 이 아이는 10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녀를 잘 타일러서 보내자 포주였던 엘리베이터 보이가 돌아와서 홀든을 폭행한다.
홀든이 뉴욕에서 애타게 찾는 것은, 단지 하룻밤 상대가 아닌, 자신과 연결되는 사람. 그 감정은 일관되게 '순수'라는 가치를 편애한다. 그의 F력은 꽤나 고상하고 이상적인 종류지만, 그래서 세태에 가장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하기도 한다. INFP와 통한다는 것은 '관례'와 '위선'을 거부하는 것이다. ‘가짜’를 솎아 낼 줄 아는 것이다. 권력이나 돈은 그 자체로 INFP에게 동기가 되는 법이 잘 없다. 그들은 내면의 고유한 가치관에 집중한다.
홀든은 자신이 좋아하는 동생 피비를 보러 몰래 집에 잠입한다. 잠든 피비를 깨워서 홀든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오빠는 모든 일을 다 싫어하는 거지? 학교마다 싫다고 했잖아. 오빠가 싫어하는 건 백만 가지도 넘을 거야 그렇지? 그럼 뭘 좋아하는지 한 가지만 말해봐."
"이렇게 너랑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걷다가, 30대가 되어 홀든의 이야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때 나는 그의 모든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멋지게 전개되는 생각도, 세련된 말재주도 없었다. 하지만 이때 내려다본 나의 인생은 온통 진흙과 검댕이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나는 수많은 얼룩을 보고 어른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넘어지기 전에, 정말로 크게 다치기 전에만 잡아주는 수호천사가 나에게 있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여전히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며 누렸을 텐데. 다시 일어나서 스스로 추스르고 세상을 향해 조금은 방어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게 된 어른 존재의 가장 깊숙한 욕망은, '아이처럼 마음껏 살면서, 다치지 않고 싶다'이지 않을까.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주인공의 절규로 시작하는 영화 <박하사탕>은 쓰러트려지고 자빠져도 털고 일어나야 하는 어른의 삶을 다룬다. 시간은 사람을 가혹하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겉모습만 유리하게 보이기보다, 내면의 미덕을 지키고 싶은 INFP의 최종 욕망은, 마음 놓고 그럴 수 있는 '순수함'일지도. “금이라고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이 아니며, 헤매는 자가 모두 길 잃은 것이 아니”라는 J.R.R 토킨의 말처럼, INFP는 남모르는 고요한 발버둥을 치는 어른이다. 어른의 세상이 밉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간.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장문학이지만, 청소년들이 명작으로 만든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작품은, 어른들의 명작이다. 어른-동화다. 밟히고 으스러져 조각이 되어도 존재의 고유한 맛, 박하 맛을 내는 박하사탕이고 싶은 어른의 욕망이 생겨야 비로소 달게 읽히는 홀든의 이야기. 사회 부적응자 불만투성이의 속마음을 늘어놓은 글자들은 더는 오염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미 순수성을 잃었음을 알아차린, 성숙하고 때늦은 어른들의 복잡함이다. 지독한 모순을 안고 있는 어른들이 사랑한 홀든이다. 결국, 내가 홀든임을 깨달은 어른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