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는 INFJ?
기원후 1세기에 쓰인 어쩌면 고대 로마의 첫 문학 소설일지도 모르는 <사티리콘>에는 해방 노예 출신 졸부가 나온다. 그는 휘황찬란한 다홍빛 가운에 금빛 장신구를 걸치고 은깃털로 이를 쑤셔댄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푼다. 아기 돼지 속에 살아있는 새를 가둔 기괴한 12첩 코스 요리를 곁들인 노예들의 퍼포먼스에 손님들의 입은 떡 벌어진다.
술과 음식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공개적으로 요강을 사용하고, 자신의 항문에 대해 떠들며, 잘생긴 소년들을 성희롱하는 저급한 모습이 이어진다.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보이지만 본성은 천박한 이 자의 이름은 ‘트리말키오’. 그리고 바로 이 자가 ‘개츠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왜 개츠비가 위대한지 말한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일까. 정작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을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Trimalchio in West Egg)’라고 제목 짓고 싶어 했다. 이 초안 제목은 발음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이유로 편집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출간을 앞두고는 마케팅적 실용에 따라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다. 비약이 아니고, ‘트리말키오’가 고대어로 ‘위대한 왕’이란 뜻이다.
그러니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땐, ‘무엇이 위대할까’라는 시험 질문의 지문을 보듯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개츠비는 위대하건, 대단하건, 어느 쪽도 아니게 평범하건,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따라, 공감하고, 경계하고, 사랑하면 되지 않을까. 최소한 작가 측은 개츠비를 특별히 드높이는 제목에는 의도가 없어 보이니.
웨스트 에그는 뉴욕 외곽에 위치한다. 반대편의 ‘이스트 에그’가 전통적인 귀족 가문들이 밀집한 지역이라면, 개츠비가 사는 ‘웨스트 에그’는 당대에 부를 축적한 신흥 부자들의 동네다. 개츠비는 매우 부유하지만, 그렇게 된지는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웨스트 에그의 저택에서 매주 토요일, 뉴욕 사교계를 열광시키는 성대하고 끝장나게 화려한 파티를 연다.
이 파티의 특이점. 초대받은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먹고 마실 동안 파티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다. 전쟁 영웅이다, 살인자다, 상속받았다더라… 무성한 소문이 돈다. 등장하지도, 생색조차 내지 않을 파티를 베풀며, 온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도 누구 한 명 제대로 안다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인맥도 연줄도 없는 이 남자. 그는 누구일까! 내성적인 파티플래너? 혹은 로또 맞은 스님? 일단 I로 추정한다.
그는 데이지를 사랑한 남자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옛연인이자, 지금의 그를 설명하는 모든 해답이다. 4년 전 둘은 뜨겁게 사랑했지만, 신분 차이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개츠비는 무일푼의 청년 장교였다. 전쟁(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와 보니, 데이지는 이스트 에그에 바람난 남편(돈은 많음)이랑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결혼생활 중이다.
겉으로는 물질과 쾌락을 좇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개츠비는 그런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어릴 적 어느 백만장자의 요트에서 일했던 개츠비는 어깨너머 본 상류 신사의 모습을 곧잘 따라 한다. 옷차림, 말투, 매너까지. 하지만 그의 예모엔 숨길 수 없는 너머의 열망이 뿜어져 나온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밤에 잠을 잘 때면 너무나 기괴하고 환상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우주가 그의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피어났다. 매일 밤 그는 새로운 환상을 계속 늘려 나갔다.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녀와 함께하는 꿈을 꾼다. 개츠비에게 그의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완벽하다. 놓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그래서 불가능할 수 없다. 자신이 그린 세계에 가슴이 부푼 N은 그 모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1. 부자가 된다. 데이지는 가난한 결혼은 하지 않을 테니.
2. 데이지의 집 근처에 대저택을 산다.
3. 성대하고 화려한 파티를 연다. 데이지도 오고 싶어 할 만큼.
4. 그녀와 다시 사랑한다.
개츠비는 금주령이 내려진 1920년대 미국에서 밀주업으로 부를 축적한다. 데이지의 웨스트에그 집이 바라다보이는, 이스트에그에 집을 얻고, 매일 만 건너 그녀의 집에서 나오는 초록 불빛을 바라본다. 그렇게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 끝에, 그녀의 사촌오빠가 이웃주민으로 이사 온다. 그의 주선으로 개츠비와 데이지는 이전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 정도면 4번까지, 모조리 J의 계획대로 되는 듯했다. 그런데 남편을 떠나 자신에게 오라는 개츠비의 요구에, 데이지가 망설인다. 이제 다 왔거늘. 참을성을 잃은 개츠비는 급기야 데이지의 남편에게 이렇게 소리치기에 이른다.
“(데이지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단 말입니다. 알아듣겠소? 이제 5년이 되어 갑니다… 당신만 몰랐던 거요.”
“지난 5년 동안 이 작자를 만나왔다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오. 우린 서로를 만날 수 없었소. 하지만 우린 그동안에도 서로 사랑하고 있었소. 어떤 때는 혼자 웃기도 했소. 당신이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말이오.”
“아, 그게 전부요? 5년 전일에 대해선 상관하지 않겠소. 그때 난 데이지를 몰랐으니까.”
5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해석을 두고 두 남자가 분분하다. 개츠비는 5년을 통째로 사랑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F의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데이지의 남편(ESTJ로 추정)은 사건에 초점을 둔다. 그는 '5년'에 대해 자신과 상관없는 시간이라고 한다. 삶의 운전대를 ‘사랑’에게 내어준 개츠비에겐 5년 만의 재회조차 모두 한 서사의 일부인 걸 말이다.
하지만 개츠비의 거의 완벽한 계획의 변수도 바로 이 '시간'. 그가 간과한 5년이다. 시간은 데이지를 바꿨다. 데이지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지나간 시간의 데이지보다 많은 층위의 감정으로 이뤄져 있으며, 오로지 로맨스에만 기반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결혼으로 그녀가 이룬 사회적 지위, 안정성과 특권이 있고, 남편과 완벽히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과 가정을 이룬 그에게 “널 사랑한 적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데이지다.
<위대한 개츠비>가 왜 대단해? 언젠간 친구가 물어왔다. 개츠비는 어떤 탁월한 인물로 쓰인 게 아닐지도 모르고 ‘트리말키오’라는 빌런이 어쩌고 늘어놓던 찰나. 친구가 다시 말했다. 그 소설이 왜 명작이야.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가장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가 뭐야.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재즈 시대의 가치를 녹여낸 문학성. 또 어떤 사람은 개츠비라는 인물 속 의미를 말한다. 문체도 빼놓을 수 없이 아름답다. 이유야 무엇이든 가능하니, 대답하는 사람만큼이나 수많을 것이다.
명작은 왜 명작일까. 단 하나의 이야기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 삶의 궤도와 경험의 집합, 감성, 가치관, 취향 모두에 가닿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것, 이 드문 일을 ‘명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개츠비가> 회자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이상향이자 잃어버린 ‘데이지’가 있다는 방증은 된다.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성격 유형이라는 INFJ는 왠지 역사 속엔 흔하다. 예수와 히틀러가 같은 INFJ라는 추론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불건강한 INFJ가 불건강한 ‘데이지’를 꿈꾼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한 개인의 ‘데이지’가 물결치듯 시공간 속에서 퍼져나가고 여러 사람을 움직인 것. 역사는 그것에 놀랐으리라.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간디, 빈 라덴이라는 이름의 ‘개츠비’들의 행동이 다른 이들의 가슴에 지핀 불꽃은 실히 드문 것이었으니까. 그런 일은 위대하고말고.
‘생각은 현실이 아니야, 생각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INFJ를 느낄 수 없다. 희망과 근면이 함께 작용할 때, INFJ는 ‘데이지’에 그 누구보다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