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은 ENFP?
외국인에게 “빨강머리의 앤”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부연설명을 하지 않곤 "글쎄"라는 대답을 들을지도 모른다. <빨강머리 앤>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원제는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이다. 초록 지붕 대신 빨강 머리가 중요해진 명칭은 일본에서 처음 사용한 번안으로, 같은 제목의 니폰 애니메이션 작품을 통해 한국으로까지 유명해졌다.
우리가 아는 제목은 ‘번안의 번역’인 셈이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원제는 확실히 앤의 생김새보단, 그녀가 존재했던 자리, ‘초록 지붕 집’을 강조했다. 우연은 아니다. 1908년 작이 출판된 이후로도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평생 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썼는데, 모두 앤이 살았던 곳의 지명이나 집을 제목으로 한다.
그러니 앤을 느끼기 위해선,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함께 들이키는 것이 중요하다. 앤과 영감을 주고받는 일상의 터전이자, 사회적 규범이라는 외부 반동은 어떻게 앤을 뒤흔들었는지, 그리고 앤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바꿨는지.
사고뭉치. 멈추지 않는 수다쟁이. 성가신 궁금증의 소유자. 이 모든 특성을 차지하더라도, 앤은 커스버트네가 원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마릴라와 매튜 커스버트는 에이번리라는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서 오직 서로를 가족 삼아 살아가는 독신 남매다. 나이가 들어 농사일이 버거워지자, 일손을 도울 남자아이를 입양하려 한다. 그런데 입양 중개사의 실수로, 앤이 오게 된 것이다.
여동생을 제외하곤 여성과 눈도 못 마주치는 예순의 남자 매튜는 한껏 들떠 자신을 소개하는 소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앤을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앤은 마릴라의 반응을 보고서야 꼬여버린 상황을 알아차린다. 보금자리가 될 거라고 기대한 집에서 앤은 한순간에 뻘쭘하고, 김 빠지고, 다시 처량한 신세가 된다.
그녀의 반응은 어땠을까. “여기 제가 입양 서류를 가지고 왔는데, 특별히 성별에 대해 기재된 건 없거든요. 혹시 남자아이를 원하신다고, 정확히 전달이 되지 않은 걸까요?” 왠지 똑부러지는 앤은 ESTJ일지도. “저는 제 또래 남자애들을 팔씨름에서 이기고요, 고아원에서는 식물을 잘 가꾸어서 상도 받았어요. 제가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기 있는 이 목초부터 옮기면 될까요?” 아마, ENFJ 앤이다.
“네 알겠습니다. 밭일을 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남자아이가 필요하시겠죠. 저는 걸음마도 떼기 전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하여…” 말하는 앤은 MBTI는 모르겠고 한국인일 것 같다.
ENFP 앤은 그 누구보다 속상한 가슴에 미어지는 앤이다.
“나를 원치 않으신다고요!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바라지 않는단 말씀이시죠!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것쯤은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제까지 나를 바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모든 일이 너무 근사해서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울고 싶어!”
하고선 식탁 의자에 앉아 두 팔을 상 위로 내던지곤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설렘에 미어지는 앤이다. 눈물 젖은 베갯잇으로 잠든 다음날, 아침 햇살과 창밖의 벚꽃 나무에 기분이 조금 회복된 듯한 앤은 이렇게 말한다.
“아침은 어떤 아침이든 좋아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상상의 여지가 많이 있거든요.”
그렇게 초록 지붕의 집에 계속 사는 자신을 상상을 하며 재잘대다가 마릴라에게 핀잔을 듣고 만다. 앤은 가능성에서 기쁨을 찾는 P지만, 그렇다고 마냥 현실을 잊은 것은 아니다. 곧 떠나야 할 곳을 더 사랑하게 될까봐, 밖엔 나가보지도 않는다. 대신 창틀의 제라늄 화분에 이름을 붙여준다. “보니”.
앤은 취미가 상상하기, 특기가 이름 짓기인 것 같다. 그런 영락없는 N이다. 평범한 마을 에이번리는 앤의 시선을 통해 특별함을 드러낸다. "반짝이는 호수", "유령의 숲", "연인의 오솔길", 버드나무 연못", "제비꽃 골짜기"... 이런식의 이름 짓기는 매튜와 기차역에서 집으로 올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커스버트 아저씨, 아까 지나온 그 새하얀 길을 뭐라고 불러요?
“글쎄다, 그 가로수길 말이냐? 아주 예쁜 곳이지”
“예쁘다고요? ‘예쁘다’라는 말만으로는 안 돼요. ‘아름답다’로도 모자라요. 어떤 말도 모두 어림없어요. (중략) 그토록 아름다운 곳을 ‘가로수길’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런 이름은 아무 뜻이 없어요. 뭐라고 하며 좋을까. 그래, ‘환희의 하얀 길’. 상상이 펼쳐지는 듯한 이름이지요?
이때부터였던 것이다. 매튜의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게.
앤의 수다는 초록 지붕의 집에 생기를 부르는 주문이다. "나까지 벌써 저 애가 다음엔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지다니." ENFP가 부린 마법에, 결국 마릴라도 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되돌려질 뻔했던 고아가 자신을 원치 않았던 곳에 자리 잡고, 마릴라와 매튜와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이야기. 그런 우연한 기회의 연속이 가족을 만드는 과정. 이것이 작가 몽고메리가 말하고 싶었던 ‘초록지붕’의 의미가 아닐까.
에이번리 마을의 역학을 이해하려면, 각 인물이 사는 집을 보자. 마릴라와 매튜는 변두리에, 작지만 잘 가꿔진 초록 지붕의 집에 산다. 그렇다면 이 동네의 ‘핵인싸’이자, ‘확성기’ 린드 부인은? 가장 중심부의 대로에 산다. 그리고 커스버트네가 예정에 없던 여자아이를 입양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외모 때문에 앤을 입양한 것 같지는 않네요.” 린드 부인의 말에 앤은 “아줌마는 참 뚱뚱하네요!”라고 응수한다.
앤은 마릴라(ISTJ로 추정)에게 F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어른을 대하는 예의범절에 대해, 자신의 예쁘지 않은 외모에 대해, 머리로 아는 것과 관계 속에서 기대하는 것은 다르다고.
“나 자신이 말하는 것과 남에게 듣는 것은 크게 달라요. 스스로는 그렇게 알고 있어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기를 바라죠. 마릴라는 내 성질이 고약하다고 여기겠지만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무엇인가 치밀어 오르고 숨이 콱 막히는 듯해서 잠자코 있을 수 없었어요”
마야 안젤루는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평가된다”라고 했다. 숨 막히게 감격한 순간, 숨 막히게 질색한 순간. 그런 순간들이 자주 있다는 것은 ENFP가 가진 마음의 재능일 것이다. 매 순간, 온 마음을 다해 사는 앤을 당신은 어떻게 평가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