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날입니다. 나는 이미 30대에 접어들어, 아득한 느낌만 남아있지만, 출근 후 책상 앞에 앉는 평소 같은 아침이 평소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결전의 책상 앞에 앉아 속을 잠재우며,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을 영혼들이 생각났어요.
어른들은 "중요한 날인데, 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라고 말합니다. 나의 부모는 "엄마도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 그때만 지나면 인생 꽤 살만하다"라고 위로해 주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맞기도, 틀리기도 한 말 같아요.
서로 수능 잘 봤냐는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는 직장인이라, 최소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미국의 수능으로 불리기도 하는 SAT를 봤다는 말에, "하버드 가려면 어느 정도 봐야 하냐. 만점이면 무조건이냐" 되묻습니다.
미국의 대학입학 환경에선 수능 점수와 특정 대학을 연결 짓지는 않습니다. 높은 점수를 받고도 좋은 대학을 떨어질 수도, 좀 더 낮은 점수를 받고도 같은 대학을 붙을 수도 있는 게 현실이라, '케바케'가 맞습니다.
그뿐일까요. 기부입학을 할 수도 있고, 가족 중에 동문이 있으면 수월해지도 하죠. 미국인들은 대체로 각 대학 입학사정관의 재량을 존중합니다.
미국 대학은 학생을 각기 다른 이유로 선발합니다. 우리 교육의 특징을 잘 흡수할 잠재력을 봐서, 특정 분야의 재능을 봐서, 구성원의 다양성을 위해, 가문의 애교심 고양을 위해, 모두가 수혜볼 교육 환경을 제고할 기부자($)이기에. 물고기 학생은 수영 실력을 보고, 원숭이 학생은 나무 타는 실력을 봅니다.
미국은 왜 점수에 따라 대학을 가지 않을까요. 미국은 공정하지 않은 걸까요. 혹은 미국 사회에선 학벌이 덜 중요해서, 국민들이 이 정도는 수용해 주는 걸까요.
'공정'이라는 단어는, 무엇이 보편적 '선'인지에 대한 가치 합의를 내포합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공정 심판', 개발도상국이라는 이유로 손해보지 않는 '공정 무역', 안전하고 존엄한 작업 환경을 향한 '공정 노동'의 예시를 생각해 보면, ‘공정’의 지향점은 분명합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최상의 ‘보상’이라는 데에 전국민적 이견이 없을 때, 입학 절차에 공정성이 중요해집니다. 제각기 다른 특색의 교육 기관과 학생들이 함께 시너지를 낼 서로를 찾는 매칭의 관점에서 보면 공정 논의는 자리를 잃습니다.
대학 다닐 적, 교수님이 전공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다가 유독 다르게 생긴 학번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학생이 의과대학에서 전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놀랐습니다. 의술보다 사진 찍기가 좋아서 사진에 집중하고 싶다는 사실 외엔 큰 이유는 없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은 아닙니다. 저는 그 학생이 찍은 사진들에 더 놀랐습니다.
미국의 대입 환경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기업이 인재상이 있듯, 학교도 학생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업들이 학교처럼, 완벽하고 투명하게, 국민들이 동의하고 허락한 기준으로만 채용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직장엔 순위가 매겨지겠죠. ‘SKY' 기업이 생기겠죠. 이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서열이 생기면,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회사가 만족스러우면 더 만족스러울 회사로 가기 위해 노력하고, 불만족스러우니까 더 나은 회사를 가려고 노력하겠죠. 누가 오늘,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학교와 직업을 그렇게 고르는 나라에서 배우자는 왜 아니겠습니까. 결혼조차, 어떤 보편적 기준에 따라 만나야 행복할 것이라고 믿게 될 겁니다. 이미 그럴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왜 시험 점수에 따라 대학을 가지 않을까요. 한 가지 이유는,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건, 내가 나의 특별하고 고유함을 안다는 것, 그래서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나와 다른 모든 개인에 대해서, 어느 학과가 최고인지, 어느 직장이 적합한지, 어느 배우자감이 어울리는지 각기 다른 이유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도저도 의사’보다 열정을 호흡하는 작가를 선택한 삶은, 현실을 밀어낼 재간이 없는 많은 이들의 염원일지도 모르나, 한편으론 내가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면, 그런 세계에서 살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몰랐을 때는 힘들었고, 조금 알게 되니 살만합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게 이런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