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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재 May 01. 2021

일상에서 건져 올린 문장

문보영 에세이<일기시대>

“너는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뭐야?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있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질문. 부쩍 고민 중인 문제라고 했습니다. (잠시 침묵.) 저는 평온, 소소한 즐거움, 성취감이 공존하는 일상 같은 걸 이야기했어요.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 많이 웃었고 조금은 슬펐던 대화를 복기하다가 다시 그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저의 대답은 목표보다는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고요.


친구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친구와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친구와 나 사이의 빈 공간에서 나의 것도 친구의 것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발생하고 우리의 영혼이 그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잡초처럼 쉭쉭, 자라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인 자들은 빈 공간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 (p29)


가까운 사람과 시시콜콜하고도 진지한 고민을 나누다 보면 문득 무언가를 배우는 순간이 있잖아요. 모두 잠이 든 새벽에 일기를 쓰는 문보영 작가는 <일기시대>(민음사 2021)에서 관계 속 배움을 ‘빈 공간에서 쉭쉭 자라나는 잡초’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친구의 질문에 고민하는 순간, 제 마음에는 무엇이 생긴 걸까요?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자라나고 있나요?


<일기시대>는 작가들이 스스로 쓰는 문학론 시리즈 ‘매일과 영원’의 첫 번째 권입니다. 만듦새도 무척 예쁜데요, 장난스럽고 통통 튀는 문체와 잘 어울리는 표지 그림은 파울 클레의 <건망증이 심한 천사>라고 해요.

 


일기를 사랑하는 문보영 작가는 <책기둥> <배틀그라운드>를 펴낸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십 대 초반에 아주머니, 아저씨 들과 함께 시를 배우기 시작했대요. 시의 세계에 깊숙이 빠질 수 있게 한 수업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대화를 인용한 부분이 특히 좋았는데요. "어떤 것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옆에 붙어 있으면 이해하게 돼, 저절로."(p94)라는 시인 선생님의 한마디, 시를 함께 공부한 삼촌의 한마디 "절벽은 떨어지는 곳, 벼랑은 서는 곳이죠~"(p92)가 그랬습니다.


진심은 마음속에 있고, 언어를 통해 끄집어내는 거라고 믿었는데 일단 너저분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은 다음에 거기서 진심을 찾는 게 시 같았다. 나는 아무 말이나 뱉어 냈다. 나도 모르는 말들을 미친 듯이 쏟아냈는데 뱉고 나니, 거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래서 진심은 너저분한 거구나 싶었다. (p84)



<선 넘기는 기본 메뉴 박기는 사이드 메뉴>라는 글에서는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시속 10킬로미터로 달렸던 경험을 유머러스하게 기록합니다. "배우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우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면 ‘배우다’의 기본형을 ‘배울다’로 수정합시다."(p155)라는 문장을 키득거리며 읽었습니다. 제 삶에서 ‘배울고’ 싶었던 여러 순간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가더라고요.


<일기시대>를 읽다 보면 일상과 꿈속에서 붙잡고 싶은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집니다. 에세이, 시, 소설, 그림일기 등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힘들 만큼 자유로운 글들이 넘실대거든요! 문보영 작가는 이 책 곳곳에 방, 도서관, 카페 등 글을 쓴 공간의 전개도를 그려 두었어요. 공간을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새롭답니다. 꿈 이야기를 기록한 ‘꿈 전시장’ 코너도 흥미롭고요. 에세이를 좋아하시는 독자뿐 아니라 개성 있는 글을 쓰고 싶은 분들에게도 <일기시대>는 재미있는 레퍼런스가 되어 줄 거예요.


문보영 에세이 <일기시대> 읽으러 가기

'꿈 일기'에 관심 있다면 독립출판물 <침묵의 바위>도 추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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