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니 May 23. 2021

돈 버는 사람들의 세계-포털을 넘은 사람들

달까지 가자, 장류진 작가

달까지 가자, 장류진 작가(창비 출판사)

*책의 내용이 포함되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데 오래걸리는 편인데, 이 두꺼운 책을 이틀만에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소설 속 코인이 떨어지면 내 심장까지 내려앉는 기분에 급하게 다음장을 넘기고, 코인이 너무 오르면 '제발 이제는 나와...!'라고 허벅지를 때리며 읽었다. 다 읽고나니 괜히 나도 코인이 하고싶어졌지만, 지금 코인판은 공포이므로...다음 '포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지^_^..


은상은 다해에게 코인을 하자고 설득하며 '이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언제 닫힐지 모르는 포털 같은 거고 [우리 같은 애들]한테 열린 아주 잠깐의 기회'라고한다. 다해는 은상의 손을 잡고 코인세계에 입문한다.

나는 다해가 넘은 포털이 단순히 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관성과 가치관이 적용되지 않는, 자본가의 세계로 넘어가는 포털인 것이다.


자본가가 된다는 건 [아름다운 바다의 전경]과 [내 계좌 속 숫자]가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던 삶에서, 사실은 둘의 관계는 필연적임을 깨닫는 삶으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돈 많이 벌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놀러가자’라는 두 명제의 선행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포털을 넘지 않은 지송은 ‘여기까지 와서 핸드폰 계좌를 들여다보고 있냐’며 화를 내지만,

포털을 넘어온 은상은 ‘ 계좌가 있으니까 여기에   있었던거다라고 한다.


경이로운 자연과 채광, 따뜻한 온도, 시원한 바람같은 것도 경제적인 요소라는게 씁쓸하다. 나는 그런 것들은 ‘가진 것 없어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배웠는데. 사실 그것들도 명품백과 외제차처럼 희소성을 띄는 자원이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돈을 버는 것에 부지런한 은상의 모습이 인상깊다. 그것은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월 단돈 9만원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소싱부터 판매, 정산까지 일련의 번거로운 과정들을 마다하지 않고, 투자를 위해서는 직접 기술에 대해 공부하고 번역기를 돌려가며 정보의 원천을 찾아다니는 열심.

아, 이 얼마나 나와 정확히 반대되는 모습인가! 나는 [가성비]를 따지며 노력에 비해 이익이 되지 않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을 연구하는 것을 거부해왔다. 결국 나는 귀찮은 행동을 하지 않고 쉬는 대신, 내 삶에 월급 외에는 (금전적인)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경험적으로 이해가 안가면 행동하지 않는 것.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싶기 때문에 지금은 신경쓰고 싶지 않은 것.

이러한 관성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 같다.

‘내가 열심히 살면 돈은 자동적으로 따라올거야’가 아니라, 돈이 있는 곳을 열심히 따라가야 돈을 번다는 사고.

‘한 만큼 버는거야’가 아니라 어떻게 벌지 머리를 굴리는 것.


사회적인 가치관도 조금씩 변해가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제도의 속성에 모두가 (아마도)익숙치는 않던 기성시대에는 금기시 되던 것들-일확천금, 이윤 제일주의 같은 것들-이 자본주의 2.5세대인 지금을 지나 3세대가 되고나면 재평가될 것 같다.

(아마 도덕적인 기준, 윤리적인 기준도 다시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경제적 자유는 자본주의 안에서 주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


마치 돈 버는 법을 다 통달한 것처럼 쓰고있지만, 나 역시 어려서 배워온 ‘노동의 숭고함’, ‘비물질적인 것의 아름다움’같은 가치에서 자유롭지 않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것, 명품백이나 외제차보다는 에코백을 들고 햇살을 맞으며 걷는 것을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이 바람직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취향이기를 자신에게 독려해왔다.


나는 은연 중에 소비는 죄악같은 것으로 생각했고, 삶 속에서 생산성을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단순히 월급만을 위함이 아닌 내 삶의(나아가 사회의) 생산성을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낮에 마땅히 회사에 출근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기업 차트나 들여다 보며 주식투자를 하는 것, 뒷짐지고 건물을 돌며 망가진 건 없는지 월세는 잘 들어왔는지 수금하는 일상은 나에겐 무가치하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훗날 내가 돈이 많아지더라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 잘하는 커리어우먼으로 회사에 남을거라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요즘은 느낀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삶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아님을. 어느 순간 ‘개인이 돈을 벌기 위해 투자 분석을 하고, 건물을 관리하는 것’이나 ‘회사의 돈을 벌기 위해 직원이 일하는 것’이 같은 이치임을 깨달았다. 창출되는 이익을 누가 가져가느냐의 차이일 뿐.

둘 다 '내가 생각하는 생산적인' 삶은 아니다. (뭘 그렇게 생산하고 싶은건지는 모르겠으나. 이쯤되면 돈은 아닌가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머리를 좀 더 써서 얼른 돈을 많이 버는게 낫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배제하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


경제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버는 방법이 월급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나마 고정된 수입원인 그것을 바로 끊어내는 것은 경제적인 선택이 아닌 것 같다. 따라서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싶다면 지금의 노동량에 더하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돈 벌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본에 주체성을 빼앗기고 말테니.


그러니까 내 말은, 유행처럼 말해지는 그 놈의 [경제적 자유]를 이루어야 내가 삶에서 추구하고 싶은 다른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왜 꼭 돈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느냐고? 우리가 살고있는 곳이 자본주의 사회라서 그렇다.


마지막에 은상은 '돈은 자기 좋다는 사람에게 간다'고 한다. 공감한다.

탐욕적인 사람이 돈을 번다는 말이 아니다.

단순히 '열심히 살면 결국엔 잘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귀찮게 일일이 시도해보는 사람이 결국 돈을 번다.


바라기로는 은상같은 사람이 되고싶지만, 적어도 지송같은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바도 분명하고, 곁에 은상과 같은 이를 두었으니. 하지만 내 주위에는 은상과 같은 지인이 없으니(아니, 어쩌면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는지도) 내가 직접 은상이 되면서도 취향을 확고히 지키는 수 밖에. 어쨌든 자본주의 제도 안에서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고 싶을 뿐이지, 돈이 가장 큰 목표가 되고 싶지는 않다.(ㅎ..왜 웃죠?)

작가의 이전글 서른의 이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