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자들의 도시, 아마시아 (2)

아마시아 박물관

by 반야

아침식사를 하기 전 리셉션에 짐을 맡겼다. 배낭에 있던 오스만어 사전과 14세기에 페르시아어로 저술된 셀주크 역사서의 현대 터키어 번역본을 꺼내 트렁크 위에 올려두었다. 사장님께서 책을 보더니 물었다.


"이거 손님 거예요?"

"아, 네. 이스탄불에서 샀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튀르키예 사람들한테도 어려운데..."


나는 그 책은 페르시아어를 현대 튀르키예어로 번역한 거라서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대화가 사장님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나는 내가 미국에서 오스만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아마시아와 이웃 도시들을 연구하기 위해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지야길 코나으

내 대답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하던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아마시아 주의 문화관광 부서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있어요. 만나보는 게 좋겠어요."


곧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거셨다.


"내일 내 친구가 호텔로 올 거예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천금같은 기회이기도 했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지역 연구가들은 누구보다 그 도시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고 계신 분들이었다. 소개받을 분께 내 연구주제를 설명하면 도움이 될 만한 유적이나 문헌, 튀르키예어 연구물들을 알려주실 수 있을 터였다. 사장님께 연신 감사 인사를 드렸다.

지야길 코나으에서 박물관으로 가던 길. 길고양이들이 밥을 기다리고 있다.

사장님의 친절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하던 옆 팀이 아마시아 성에 관해 대화하는 게 들렸다. 나도 사장님께 아마시아 성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여쭈었다. 택시를 타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이스탄불에서 택시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이 있던 나는 걸어서 갈 수는 없냐고 되물었다. 난감한 눈치였다. 튀르키예어로 말씀하셨다.


"그냥 저희가 태워다 줄게요. 손님은 장기 투숙객이시니까."


장기투숙이래 봐야 5박 6일 머물 뿐이었다. 특별대우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조금 얼떨떨했다. 일단은 감사하다며 넙죽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언어실력이 서툴러서 말뜻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혹시 유료로 해주시는 픽업 서비스인데 내가 무료로 오인했나?


오랜 타지생활로 말미암은 불안증세가 도졌다. 속으로 대화를 곱씹다가 이내 포기했다. 나중에 생각하자.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사장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겠지. 설령 돈을 요구하신 대도 그냥 드리면 될 일이다.

의문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사장님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첫 행선지는 아마시아 박물관이었다.

아마시아 박물관 입구와 티켓

아마시아 박물관은 지야길 코나으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었다. 외국인 방문객에게 적용되는 입장권 가격은 3유로. 당시 리라 환율에 따르면 135리라 정도였다.


박물관은 두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층에는 선사 시대부터 비잔티움 시대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셀주크와 일한국, 오스만 시대 유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나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바예지드 2세 모스크의 창문덮개

전시되어 있던 여러 유물 가운데 내 눈길을 끈 것은 바예지드 2세 모스크에서 가져온 창문 덮개였다. 모스크가 1486년에 지어졌으니 이 나 덮개도 그쯤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이 창문 덮개가 중요한 이유는 장식으로 새겨져 있는 카이으 부족의 상징(터키어로는 담가 damga") 때문이다. 카이으는 오우즈 튀르크족의 한 분파이다. 카이으 문양이 창문덮개에 새겨진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카이으 부족과 그들이 쓰는 상징 자체는 이미 11세기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라는 카라한국 출신의 튀르크인 학자가 쓴 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 이후로 이슬람권에서는 오우즈족 담론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오스만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건국 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스만 제국에서는 오우즈나 카이으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1430년대, 오스만 제국의 제6대 술탄인 무라드 2세가 카이으 부족 출신임을 대내외에 선전하고 동전에까지 카이으 문양을 새겨넣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오우즈 내지는 카이으와의 연관성을 강조한 오스만 술탄은 무라드 2세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오우즈 설화에 유독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무라드 2세가 룸 지방(아마시아-토카트-시바스)에서 성장기를 보낸 것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 무라드 2세는 아마시아에서 나고 자라서 훗날 총독까지 역임한, 아마시아 토박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예지드 2세가 세운 모스크에서 카이으 문양이 발견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무라드 2세 이외에 카이으 문양을 공식적인 맥락에서 활용한 또 한 명의 술탄이, 하필 무라드 2세처럼 아마시아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바에지드 2세인 것이다. 이 나서 잔뜩 사진을 찍었다.

창문덮개에 새겨진 페르시아어 시문.

한편 창문덮개 상단에 새겨진 페르시아어 시문도 읽어봄직했다.


이곳이 연인들의 카바(메카에 있는 신성한 검은 돌)가 되기를. 불완전한 이들이 이곳에 와 온전해졌도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슬람 문학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은 신과의 신비주의적 결합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문장만 두고 보면 이 모스크가 사랑을 이루어주는 마법의 장소라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하지만 아마시아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바로 여덟 구의 미라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이어 튀르키예에서 두 번째로 보는 미라들이다. 미라가 전시된 특별실 앞에는 귀여운 경고문이 붙어있다.


박물관 관람객분들께 주의 바랍니다.

어린이들은 미라가 있는 전시실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시실 관람에 대한 책임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나도 조금 무서웠지만 보호자가 없는 관계로 용감히 들어갔다.

일한국에서 파견한 룸의 나즈르(재무관)였던 이슈부가 노인의 미라.
일한국에서 파견한 룸의 나즈르이자 아마시아의 충독이었던 셰흐자데 주무다르 베이의 미라.

전시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아마시아에 체류했던 두 일한국 관료의 미라가 반겨(?) 준다. 왼쪽이 이슈부가 노인, 그리고 오른쪽이 주무다르 베이이다. 전시된 순서상으로는 이슈부가가 먼저이지만 실제로는 주무다르가 더 이른 시대에 살았다. 둘다 일한국에서 보낸 룸 지역의 "나즈르"였다고 한다. 나즈르는 국고를 관리하고 봉급을 지급하는 업무를 맡은 고위직 관리이다. 일한국의 룸 재무관들은 전부 아마시아에서 살았던 것인지 궁금했다. 또 이슬람에서는 무덤을 가족묘 형식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둘은 어쩌다가 둘이서 함께 안치되었는지, 가족들도 함께였다면 왜 그들은 미라가 되지 않았는지도 궁금했다.


두 미라는 나중에 나올 부르말르 미나레("뒤틀린 미나렛") 모스크에 딸린 큠베트(지붕이 뾰족한 형태의 이슬람 영묘. 오스만 시대의 튜르베와 유사)에서 발견됐다. 관련된 공식 기록은 없지만, 미라를 직접 조사한 연구자분에 따르면 일부 내장이 제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생긴 미라가 아니, 인위적으로 제작된 미라로 추정된다고 한다.


참고로 벽에 그려진 그림은 실제 미라와 상관없는 상상화라고 한다. (다만 인터넷에는 미라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복원한 그림이라는 기사가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일한국 출신 관료들이라 그런지 동양인 모습으로 그려진 점이 홍미로웠다. 미라들이 정말로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동양인 특유의 골격을 가진 것도 같았다. 또 그림에서처럼 이슈보가 노인의 미라는 키가 컸다.

나머지는 페트히예 모스크에서 나온 미라 가족이었다. 페트히예 모스크는 비잔티움 제국 시절 교회로 지어졌으나 다니슈멘드국이 1116년 아마시아를 정복하면서 모스크로 바뀌었다. 본래 교회였던 곳이기에 건물 지하에 기독교식 지하모지 (crypt)가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이 미라들이 발견됐다.


이 미라들은 일한국 미라들이 있던 부르말르 미나레 모스크의 큠베트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에블리야 첼레비라는 17세기 오스만 여행가가 아마시아를 방문했을 때 박물관에 전시된 8구의 미라 모두 부르말르 미나레 마스크에 모여 있던 상태였다.


미라 가족은 이젯딘 메흐메드 페르바네 베이라는 인물과 그 가족으로 비정되어 있다. 이젯딘 메흐메드 페르바네는 13세기 말 셀주크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무인 앗 딘 슐레이만 페르바네의 남동생이나 아들이란다. 확실한 근거는 없다. 내가 만난 연구자님은 미라들이 안치되어 있던 곳이 교회의 지하묘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시아 지역의 유력한 기독교인 가족이었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아빠와 엄마 미라는 수십 년 전 수해를 입어 다소 손상되어 있었다. 아기미라들은 상태가 좋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작은 아이들이 넷씩이나 무덤에 묻히게 되었을까. 안타까웠다.

기원전 15세기 히타이트 유물

박물관 1층으로 돌아와 다른 유물들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중에는 기원전 15세기에 이 지역에 거주하던 히타이트인들이 청동으로 만든 작은 동상이 있었다. 이 유물과 함께 아마시아 박물관 관람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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