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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묵 Aug 18. 2023

[미니멀 라이프 1화] 위아래 합쳐서 스물다섯 벌입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미니멀 라이프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 둘, 셋.... 스물셋, 스물넷, 스물다섯!


옷장에 있는 옷을 세보았다. 편하게 돌려 입는 반팔티부터, 격식이 있는 자리에 입고 갈 정장까지 그리고 산뜻한 봄에 입기 좋은 셔츠에서부터 추운 겨울철을 보호해 줄 롱패딩까지 모두 합치니 스물다섯 벌이었다. 얼마 전 모임에서 얼추 열다섯 벌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반팔부터 위아래 상하의를 모두 합치니 스물 다섯 벌이 있었다. 그 와중에 자주 입는 옷과 안 입는 옷이 구분되는 게 있다니.. 신기할 뿐이다.


옷장을 빠져나와 집을 한 번 둘러본다. 직업이 사진작가라 카메라 보관 냉장고와 카메라 그리고 렌즈, 얼마 전에 새롭게 맞춘 데스크탑, 휴대용으로 들고 다니는 4년째 쓰고 있는 노트북 하나. 카메라 가방 하나와 백팩 하나 메신저 백 하나. 러닝화 하나, 구두 하나, 운동화 하나, 풋살화 하나, 슬리퍼 하나. 책장에 꽂혀 있는 몇 개의 책. 이 집에서 내가 소유한 분량이다. 여자친구와 함께 살기에 10평 남짓 복층 오피스텔은 좁은 곳이지만, 짐이 몇 없는 까닭에 나름 충분하고 널찍하게 쓰고 있는 중이다. 살다 보면 짐이 추가되긴 하겠지만. (벌써 조금씩 가구를 들이고 있는 중이다.)

너무나도 여유롭게 쓰고 있는 옷장. 그리 깨끗한 옷장은 아니지만... 작은 옷장에 옷이 별로 없다.




의도치 않은 미니멀 라이프


본래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꿈꾼 건 아니었다. 20대부터 꽤 잦은 이사로 (지금까지 셈을 해보니 딱 서른 번 이사를 했다.) 짐이 많으면 힘들 수밖에 없었고,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싶었던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옷을 사거나 물건을 사기보단 모든 돈을 여행에 쓰기 바빴었다. 코로나로 잠잠해진 뒤에도 짐을 사기보다는 1년 동안 귀촌을 하면서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여행을 해본다거나, 오히려 저 멀리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거나 하면서 나름의 방식대로 여행을 이어갔다. 6 대륙을 다 둘러본 후에야 이제 여행보다는 일상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하나, 둘 내게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 시작하며 카메라 렌즈도 조금 더 좋은 걸 구입하고, 좋은 사양으로 데스크탑을 맞추기도 하면서 하나씩 나를 위한 소비를 하긴 하지만 여전히 또래 친구들에 비해 매우 적은 짐을 갖고 있다.


단순히 여행과 잦은 이사때문은 아니었다. 26살까지는 그래도 이런저런 짐이 많았는데 살고 있던 셰어하우스에 불이 나게 되면서 모든 짐이 다 타버렸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내가 여행중일 때라 정말 중요한 물건들은 배낭에 있었지만, 꽤 큰 피해를 보았다. 유럽 여행 도중 강도를 만나서 남아있는 짐 마저도 뜯기게 되고 (정말 다행히도 카메라와 여권은 지켰지만), 작년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큰맘 먹고 뽑았던 미니쿠퍼도 침수를 당했다. 그 외에도 식탁, 에어컨, 각종 가구들이 물에 잠기면서 짐이 또 한 번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 미니멀 라이프는 어떻게 보면 재난과 사고로 인해 형성된 것도 일부 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물건을 사도 그리 비싸지 않은 가성비 물품을 사다 보니 잃어버려도 그리 아쉬움이 없던 것도 있고, 많이 입거나 해진 옷들은 망설이지 않고 버리거나, 어디다가 뒀는지 자주 까먹는 바람에 옷장에 옷이 그리 모일 일이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이사가 잦고, 재난과 사고가 있고, 덜렁거리는 성격과 욕심이 적은 성격에 물건들이 모일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사할 때 배낭 하나와 박스 5개 정도면 충분히 이사가 가능한 사람이라 따로 포장이사나, 용달을 부를 이유도 없었다. 서른 번 이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포장이사를 했다고 생각하면... 그 돈 만 얼추 천만 원이 넘어갔을 것이다.



의도한 미니멀 라이프


여러 요인들로 미니멀라이프로 살다 보니 이제는 의도하면서 미니멀 라이프로 살아보려는 의지도 있다. 적게 벌고 적게 써서 내 시간을 많이 만들기, 그리고 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잘 걷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서 보내고 싶었다. 안빈낙도 무위도식을 꿈꿔서 그런지 느리게 살고, 적게 갖고, 욕심 없이 사는 게 좋아 보였다. (물론 개 중에도 욕심을 내는 부분이 있지만, 그건 취향 아니겠는가.)


의도한 미니멀라이프라고 한다면 1주일에 하루 정도는 1일 1 식 하기, 쓰레기는 어지간하면 바로 버리기, 집 냉장고에 음식을 1주일 이상 두지 않기(김치나 대용량은 제외), 장비를 살 때는 비싼 돈을 주더라도 차라리 좋은걸 사서 오래 쓰기, 필요한 게 아니면 구입하지 않기, OTT 구독 안 하기, 음원 스트리밍 구독 안 하기, 책은 좋아하는 책은 구입하고 어지간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 실제로 사용을 안 하는 물건들은 과감하게 버리기, 2년에 한 번 정도는 안 쓰는 옷을 모아서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기, 핸드폰을 바꿀 때 이전에 사진은 외장하드로 옮겨 놓고 사진 옮겨놓지 않기, 하루에 5분이나 10분 정도는 집안을 정리하기 정도가 되겠다. 물욕이 크게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삶에서 음악이 없어도 잘 사는 사람에다가, 영상보다는 글이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OTT나 스트리밍이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오히려 게임은 좀 좋아하는 편이라서 어디 이동할 때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책을 읽거나, 장기를 두는 게 전부다. 이렇게 적고 보니 생각보다 굉장히 심심한 사람이네...


직장도 안 다니고 있고, 딱히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적어서 시간적 여유가 많다. 그럴 때는 잠을 좀 더 자거나, 아니면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한다. 은근히 바쁜 하루.



의도하지 않으려 하는 미니멀라이프


미니멀라이프로 살면 대충 얼마 정도 쓰냐고 하면... 175만 원 정도가 고정지출이다. (은근 많이 나온다.) 대략적인 세부 항목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월세 및 공과금 : 55만 원

핸드폰 비 : 5만 원

청년희망적금 : 50만 원

주택청약 : 10만 원

운동비 : 5만 원 (월, 수, 금 자유수영 2만 원 + 풋살 회비 3만 원)

보험비 : 10만 원

교통비 : 5만 원

식비 : 35만 원


보험과 적금은 저축으로 본다면 고정지출이 100만 원이겠지만, 실제로 한 달에 쓰는 비용은 저축까지 포함해 200만 원 언저리가 된다. 가끔씩 생기는 경조사비도 있고, 친구들 생일이나 부모님 생일에는 선물도 보내드려야 하고, 모임이 있어서 나가서 술을 마시거나 놀다 보면 돈을 훌쩍 쓰게 되는 게 일상 다반사다. 한 달에 200만 원 내외로 쓴다고 하면 25만 원 정도의 여유가 생기는데 그걸로 친구들 선물이나, 경조사비, 약속비(유흥비)로 쓴다. 이런 경우에는 크게 돈을 아끼려고 하지 않는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한테 돈 쓰는 것은 결국 다 돌아온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끼는 게 싫기도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한다.


그 외에도 자기 투자에는 안 아끼려고 하는데, 가령 여행이 가고 싶다던가, 책을 읽고 싶다던가, 운동을 하고 싶다던가 하면 과감하게 쓰려고 하는 편이다.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고 있어서 돈을 많이 투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다른 여윳돈이 생기게 되면 자기 자신한테 쓰려고 한다.

최근에 투자한 컴퓨터 구입비. CPU나 그래픽카드나 좋은 걸 쓰고 싶어서 비용을 많이 투자했다. 마지막 월급 받고 투자한 비용. 앞으로 이 녀석 가지고 남은 30대를 버텨야지



내 소비에는 취향이 없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 배낭의 무게는 자신의 삶의 무게와 같다고. 그 말에 꽂혀 배낭이든, 일상에서의 짐이든 최소한으로 하려고 했던 모습도 있었다. 어떻게 얼마만큼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취향이나 삶을 알 수 있는 건 소비에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내 모습은 미니멀라이프를 제외하고서는 이렇다 할만한 취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는 조금 더 나를 위해 쓰는 습관을 들이고 싶고, 미래의 나를 위해 저축하는 습관도 들이고 싶다. 지금까지야 적게 벌어서 적게 쓰자였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벌어서, 나를 위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자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겁이 많아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미니멀하게 사는 것도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 건지, 지금의 모습으로 계속할 수 있는 건지, 무엇에 더 돈을 쓰고 싶은 건지 천천히 탐구해 보는 요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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