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쉬다가 갑자기 취업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보드게임을 같이하던 형이 호텔 촬영도 가능하냐며 혹시 포트폴리오를 받을 수 있겠냐는 말에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첨부해 보냈다.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본 형은 바로 "이럴 거면 우리랑 같이 일해볼래?"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회사인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형외과였고, 거기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상상이 잘 안 됐었다.
"저 아직 일할생각 없어요. 쉬는 게 좋기도 하고 좀 더 쉬고 싶어요"
"일단 면접 보러 와봐. 그때 가서 이야기해"
강압적인(?) 스탠스에 생각보다 놀랐고, 얼레벌레하다 보니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 보기 전까지도 얼굴 보고 거절하는 게 예의니 얼굴 보고 거절하려 했다. 어쩌다 보니 면접을 보게 되었고, 거기에는 형뿐만 아니라 마케팅 팀장님도 같이 참석해 면접을 보셨다. 머릿속으로는 '도대체 뭐를 보고 나를 뽑으려고 하는 거지?' 머리가 스쳤고 면접을 보는 내내 "저 근데 생각하시는 것보다 그리 잘하는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다 배우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였다. 도대체 이 회사 뭐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면접자와 부담감에 자신을 깎아먹는 면접자 그 사이에서 방황하기를 1시간. 면접은 종료되었고, 거기서는 면접자리에서 합격을 통보하셨다. '네? 저 아직 합류하겠다는 이야기 안 했는데요...' 머릿속에 스쳤지만, 형이 운영관리팀장에 인사권을 갖고 있다 보니 말 한마디면 채용이 되는 건가 싶었다. 물론 내일까지 좀 생각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회사에서는 '이 친구 들어오겠구먼'이라 생각했나 보다.
이후 형과 같이 점심을 먹으며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 잘 생각해. 프리랜서를 하고 싶다, 직장인을 하고 싶다 지금 이 고민을 할 때가 아니야 너 아직 어려. 너 포트폴리오 보니까 기획역량이 좀 추가되면 사진도 찍겠다, 글도 좀 쓰겠다.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더라. 여기에서 2년 정도만 일 해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대충 일하는 사람들 아니야. 당연히 병원이라서 네가 모르는 분야겠지. 그래도 여기서 기획 배워서 나가서 네 사업을 하든, 아니면 네가 말하는 중고신입으로 가든 잘 생각해 봐. 어느 쪽이든 도움 될걸."
"포토그래퍼로 인하우스로 일하면 확실히 상한가가 있는 것 같다고 느껴요. 그래서 더 잘해야 하는 것 같고요. 그렇지만 어쨌든 사진을 하고 싶은걸요. 아니면 출판 쪽으로도 생각이 있고요"
"나는 솔직히 내 제안에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너 직전 회사에서 얼마 받았어?"
"저 3천 중후반 정도로 받았었어요"
"여기서 그러면 4천 줄게. 그리고 실업급여로 받는 돈 우리가 현금으로 주든,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주든 어떻게든 줄게."
"저 정말 궁금한 건데 그렇게 까지 저를 쓰려는 이유가 뭐예요? 더 좋은 마케터들 많을 텐데요."
"나 네가 쓴 월정리 읽었잖아. 나는 살면서 정말 중요한 스킬이 글쓰기라 생각해. 글에 사람이 다 보이거든. 근데 한 달에 한 번씩 무료로 매거진을 만들어서 배포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 생각해. 매거진을 만들어 배포하는 건 직무로 보면 글쓰기도 어느 정도 된다는 거고, 편집 & 디자인도 된다는 거고,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네가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이나 기획, 그리고 디자인에 역량이 부족한 거 알아. 여기서 배우라고. 그리고 영상까지 넓혀보고. 너 그거만 하면 네가 프리를 하든, 중고신입을 가든, 뭘 하든 다 된다. 형 믿어봐."
점심을 다 먹고, 봉투에 면접비라고 3만 원을 받고 집으로 향했다. 애인, 가족, 친구들, 앞선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했고 걱정하는 사람 반, 해보라는 사람 반으로 나뉘었다. 그날 밤 나는 취업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취업을 선택한 이유는 만들면 다양하게 만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마침 실업급여받으며 쉬은 게 살짝 지루해질 쯤이어서 실금을 끝까지 받기보단, 좋은 자리가 있으면 조기 재취업수당이나 아니면 빠르게 사업자를 내서 조기 재취업수당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래는 내가 취업을 선택한 이유다.
1) 연봉이 4천대로 올라 받을 수 있고, 취업으로 인해 실업급여를 못 받는 것도 따로 챙겨준다고 했다.
실업급여를 8월 중순에 신청해서 아직 받을 수 있는 급여가 800만 원 정도 남아있는데, 이 또한 따로 챙겨주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4,800만 원 정도의 연봉이 되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벌이다. 상반기에 외주가 적어서 그리 많은 돈을 못 번개 아쉬움이었는데, 이를 하반기에 해소해 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컸다.
한 가지 더는 여자친구 부모님을 뵌 적이 있는데 아버님께서 5,000 정도는 벌어야 안정감이 있지 않겠냐는 말에 믿음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여자친구 역시도 우리가 모은 자산이 각자 1억 정도 있고, 연 수입이 5천 정도 되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증명해 보이고 싶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큰돈을 굴리려면 결국 1억 단위가 모여야 되는데 이곳에서 일하면 2년 동안 실력도 쌓으면서 목돈을 모으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저축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을 다니면서 나를 위한 투자를 조금 더 늘릴생각이다.
2) 사진으로만 먹고살기에 힘들다는 걸 직감했다.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굴려도 사진을 정말 잘 찍거나, 포지셔닝을 잘하지 않는 이상 사진으로 먹고살기는 어렵다는 생각 + 자신 없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수영을 하러 가는데 문득 이렇게 계속 지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려워 보였다. 하반기에 들어서 외주가 조금씩 생기긴 했지만, 수입을 모두 충당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사진 외에 하려고 하는 활동들 (가령 옷을 만든다거나, 커뮤니티를 운영한다던가)은 어느 정도 직장을 다니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라 판단했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계속 커리어를 이어갈지, 아니면 창업으로 노선을 틀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시드가 부족한 건 사실이니 회사를 다니면서 장비를 투자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런 과정이 있어야 사진으로만 먹고살 수 있는 기본 세팅이 될 것 같았다. 어림잡아 2년 정도 이곳에서 돈을 벌면 내 사업의 밑바탕 + 실력적으로 향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3) 정 안되면 그만두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
올해 퇴사와 이직이 잦아서 커리어가 점점 꼬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마지막에만 잘 풀어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곳에 다니는 선택을 했을 때 가장 최악의 수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을 때 실업급여를 놓치면서, 업무에 치이고 또 적응 못해서 금방 쫓겨나 자존감이 떨어지고, 형과의 관계가 틀어진다 이 3가지인데, 이 3가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이었다. 정 안되면 그만 두지 뭐... 이런 가벼운 생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전 직장에서 정말 잘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초반에 달리다 보니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아, 이번에는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되 너무 애쓰지 말자는 생각으로 일해보려 한다.
4) 이번에 전세금을 빼주면서 느꼈던 불안함을 덜고 싶었다.
화곡동 빌라를 빼주면서 내가 시드가 적으니 어떤 경제적 문제가 생겨도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느꼈다. 1년 정도 다니면 은행권에서 대출도 잘 나오니까 최소한의 바운더리를 내가 만들어 놓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5) 커리어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4가지
첫째로는 단순히 성형외과에서 마케터 역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호텔촬영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메리트였다. 물론 외주로 받아서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선정된다는 보장이 없는데 직원에서 일하면 굳이 외부 인건비를 쓰기보단 나에게 일을 맡길 확률이 높다 느꼈고, 이로 인해 호텔 촬영 포트폴리오를 갖고 싶었다. (가장 욕심나는 부분) 18년에 우연한 계기로 볼리비아 우유니에 있는 소금 호텔을 촬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기록이 잘 아카이빙 되어있지도 않고, 공간은 계속해서 사라졌다가 나타날 테니 공간 기반의 사진을 잘 찍어두면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호텔 쪽 포폴이 잘 잡혀있으면, 나중에 건축 사무소나 혹은 에어비엔비 같은 곳에서 촬영 문의가 잘 들어올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둘째로는 이번 기회가 왠지 동찬이 형(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형)을 만났을 때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형이 나를 등쳐먹으려고 하는지, 아니면 진심 어리게 이 부분이 보완되면 잘 될 것 같은 마음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조건으로 나를 쓰려고 했고, 형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기획역량을 충분히 쌓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하는 말을 조금 믿어보고 싶기도 했다. 막말로 아니면 나오면 되는 거고, 정말 기를 수 있으면 열심히 배우면 되는 거니까. 굳이 안 할 이유가 있나 싶었다.
셋째로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혹은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돈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추측. 최근에 본 책에서 결국 가격이 오르기 위한 중요 조건은 통화량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곳은 고객이 명확하고, 고객이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도 명확했다. 또한 비록 성형외과라 다르긴 하지만 해외 영업 쪽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에게 해외 파견의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몫을 했다.
넷째로는 상사가 있다는 점. 지금까지 마케터나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면서 첫 회사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상사가 없어서 힘들었는데, 이곳에서는 키를 잡아줄 상사가 있다는 사실이 안정감 있게 다가왔다. 면접을 보면서 느낀 아우라가 일 잘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서 옆에서 많이 혼나며, 많이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 지난 회사에서 가족회사 + 여초회사에 데였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면접에서 염려스러운 말로 "이곳 여초인데 괜찮아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지금까지 겪었던 필드가 대부분 여초 긴 하지만 필드에서 일해본 바로는 그리 좋은 기억이 없다. 같은 환경에 놓이는 것 같아서 염려스럽다.
2) 결국 또 누군가를 실망시킬까 봐 두렵다.
나와 함께 일하면 내 가까운 사람이 나를 떠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그렇지 않은 게 유일하게 사진이라 인하우스 포토그래퍼로 들어갔던 건데, 그 마저도 좋은 결과를 못 미쳐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고, 겁이 많은 상태다. 취업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그날 밤에 너무 무서운 나머지 잠이 안 와서 4시까지 뜬 눈으로 있었기도 했고.. 여러모로 두려움이 많다. 사실 2번이 가장 큰 두려움
3) 섣부르게 취업했다가 이도저도 안될까 봐 무서움
이거는 친구들이 많이 걱정하는 부분. 비전이 아니라 조건을 보고 결정을 매번 하다 보니 실망을 많이 하게 되고 내쳐지는 거 아니냐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기도 했고. 나 역시도 여기서 너무 오래 일하면 안주하게 될 것 같았다. 여자친구 말대로 아직까지는 대기업 중고신입으로 넣을 수 있는데, 괜히 그 기회를 날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일단 돈을 많이 모으는 것. 결국 시드를 모으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고, 그게 지금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획역량을 펼쳐보라 했으니, 여기서 기획력을 조금 더 디벨롭시키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 무엇보다 종종 있는 촬영 기회는 잘 살려보고 싶기도 하고, 바쁘게 일을 쳐내기보다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올 때쯤에는 나도 내 프로젝트를 하나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깜냥을 기를 수 있으면 제일 좋을 것 같고.
또한 이곳에 다니면서 버는 돈은 아껴는 쓰되, 내 투자를 위해 아낌없이 쓰고 싶다. 특히 올해 버는 돈은 빠르게 투자해서 더 좋은 것들이나 스킬을 업그레이드하는데 쓰고 싶다. 분야가 전혀 다른 길에 왔지만, 결국 마케팅을 하는 프로세스는 어떤 분야든 크게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고, 내 사업에도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기에 잘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스탠스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너무 졸아있지 않는 것, 일상의 루틴을 잘 지켜내면서 일해보고 싶다. 너무 졸지 않으면서 가볍게 하는 느낌으로. 오히려 첫 회사에서 그런 스탠스를 잘 유지했던 것 같은데, 그런 장점을 잘 살리고 싶다.
정량적으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퇴근 이후에는 좀 더 알차게 살아야겠다. 전 회사 다닐 때가 진짜 알차게 살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잘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