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 수록 국물을 찾게 된다. 요즘 같은 환절기에 따끈한 국물을 한 수저 들이켜면 몸에 있는 피로까지 녹아내는 느낌이랄까. 어르신들이 왜 그리 국밥을 좋아하시는지 알 것 같은 나이가 되면서 국물을 들이켠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국물을 찾으면 자극적인 맛을 찾았다. 가령 라면 국물이라던지, 국밥에 다대기와 후춧가루가 듬뿍 들어간다던지, 김칫국물이 조릴 때까지 조려져서 밥과 한 수저 퍼먹는 김치찜이라던지. 이런 자극적인 국물을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간이 덜 들어간 심심한 맛이 좋다. 설렁탕에 소금 조금과 후추 조금 넣어서 먹는 다든가, 국밥 그대로 먹는다든가, 비빔국수보다는 고기국수를 찾는다든가... 심심한 맛을 찾고 있다.
최근에 내 삶을 돌이켜 보면 꽤 심심한 맛으로 살고 있다. 어릴 적 30~40명 불러놓고 생일파티를 즐기며 자극적인 쾌락을 찾던 나였는데, 이제는 소소하게 한 테이블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정도의 인원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 뿐이랴 하루하루가 특별하기 바랐던 예전과 달리 오늘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보니 심심한 저녁이 이어지고 있다. 친구를 만나 유흥을 즐기기 바빴던 과거였는데, 요즘은 집에 들어와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는 정도. 갓생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하고, 심심한 삶을 쭉 이어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요즘은 마음도 심심하다. 뜨겁고 정열적인 사랑을 추구했던 지난 연애와 달리 조용히 평온한 하루를 넘기며 소소한 이야깃거리에 깔깔거리는 연애를 하고 있기도, 일로써 대단한 성과를 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조용한 퇴사자처럼 일을 하고 있기도, 내 집 마련을 꼭 해야 한다는 마음보단 어떻게든 내가 몸 누울 곳 한 곳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도, 돈을 더 벌고 싶다는 마음 보단 시간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심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가끔은 너무 심심한 나머지,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어쩌면 이런 쳇바퀴를 만들고 싶어서 그동안 자극적으로 살아왔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편식을 해왔다.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무엇을 먹고, 어떤 경우에는 무엇을 안 먹다 보니 (예를 들면 찌개는 먹지만 국은 안 먹는다거나, 포장마차 어묵은 먹지만 떡볶이 어묵은 먹지 않는)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한다. 음식뿐만 아니라 취향도 무어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찾아 나서는 성향이 있다. 취향도 편식하는 셈이다. 최근에 편식하고 있는 취향을 조금 나열 해보자면
1) 수영
수영에서 다른 영법은 못하지만 자유형은 할 줄 안다. 7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수영을 하고 있고, 그 외에도 짬짬이 수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꾸준히 수영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25m도 헥헥거렸는데 이제는 50m 레일 왕복이 가능하고, 한번 가면 보통 1km 정도 수영을 하고 온다. 여전히 다른 영법은 하지 못해서 자유형만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질리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올해 안에 50분 1.5km 찍을 수 있도록 해보는 게 목표!
2) 코닥 어패럴
무릇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코닥을 입어야 하지 않겠냐며(아니다) 코닥 어패럴을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물 받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수준에서, 지금은 아노락, 후리스, 재킷, 패딩, 신발, 양발 등등... 여러 코닥 제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옷장에 옷이 40벌이 안되는데, 그중 10벌 정도가 코닥 어패럴 상품. 너무 비싼 나머지 당근으로 하나 둘 사모았더니 어느덧 10벌이 되었다. 요즘 코닥 사는 맛으로 살아가는 느낌이랄까! 다음에는 가방도 사야지 :)
3) 애플
여러 편의로 안드로이드와 윈도를 썼는데 회사에서 맥북을 쓰면서 + 기존에 쓰던 갤럭시가 2년 정도 되면서 아이폰 15를 구입했다. 애플 제품으로 넘어오면서 바로 든 생각은 ‘왜 이제야 애플로 넘어왔지?’라는 생각. 아직 적응 중이긴 하지만 모든 인터페이스가 나하고 맞게 느껴진다.
또한 애플로 넘어오면서 구글 포토를 깔게 되었는데 거기에 내가 잃어버렸던 여행사진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쉽게도 초반에 여행했던 많은 나라들 (미국, 인도, 동남아 등등…) 사진은 없지만 유럽과 남미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사진이 많이 백업되어 있어서 사진을 보며 옛 생각에 잠기게 됐다. 애플을 써서 발견한 소중한 보물들.
쓴 맛을 싫어한다. 어려서부터 키 크는데 좋다는 홍삼 비스무리한 한약도 쓰다는 이유로 멀리했고, 나이가 먹어서도 몸이 아플 때 쓴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도 손사래를 치고, 흑마늘이 남자에게 좋다고 주변에서 말해도 쓰다는 이유로 멀리한다. 그런데 이 쓴 맛에 앞에 달콤한 마법의 단어를 하나 넣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바로 '돈'. 요즘 '돈' 쓰는 맛을 알아버려서 그런지 (돈)쓴 맛이 참 달콤하다.
자랑을 좀 하자면 최근에 돈 좀 썼다. 플래그쉽 카메라 바디와 렌즈를 샀고, 맥북 M2 프로, 삼각대, 파이널컷 등 시원하게 자신을 위해 (회사 돈으로) 투자를 했다. 무릇 사진 하는 사람은 갤럭시가 아닌 아이폰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며 아이폰 15 플러스를 사기도, 30대가 되었으니 운동을 해야겠다며 PT를 끊기도, 출근할 때 한강 라이딩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마음에 모터벨로를 사기도, 좋은 장비에서 좋은 실력이 나온다며 풋살 장비를 사기도, 홍콩-마카오 항공권을 발권하기도, 코닥 어패럴 옷을 주구장창 사기도, 낡아빠진 화곡동 집 인테리어를 새로 하기도, 읽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사기도 했다.
왜 이렇게 돈을 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즘 집과 지갑이 안정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사가 잦았던 지난 과거와 달리 이곳에서 지금 애인과 이별만 하지 않는다면 지금 집에서 계속해서 잘 살 것이고, 가을 성수기 찾아와서인지 회사 월급과 간간한 외주를 뛰다 보니 수입도 썩 괜찮다 보니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다. 혹은 지난 나 스스로가 나를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보상심리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출이 나를 투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소비를 했다.
다만 이 쓴 맛은 고통 뒤에 달달함이 있다는 고진감래와는 조금 상반된다. 돈 쓴 맛은 달달함이 먼저 찾아오고 이후에 할부금이란 이름으로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앞으로는 돈 쓴 맛이 아니라, 쓴 맛을 느껴야 할 시간이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싹 도는 음식들이 있다. 나에게는 회종류나, 떡볶이, 이글이글 철판에 굽는 고기들을 보면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음식을 자주 먹을 수 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값도 비싸기도 하고, 나가서 같이 먹기에도 애매하고, 또 자주 먹으면 물리는 음식들이니까.
음식이 아닌 무언가에 내가 감칠맛을 느꼈던 게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파블로브의 개처럼 특정 단어만 들어도 군침이 싹 돌고, 감칠맛이 느껴지는 그 무언가. 그것은 '여행'이었지 않을까.
최근에 다시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잠시 4박 5일 정도로 쉬고 오기보다는 한 달 정도 긴 텀을 갖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한 달 동안 발리로 떠나서 하염없이 노을을 바라보고 맥주를 홀짝이다가 서핑을 하러 간다던가, 캐나다로 떠나 밴쿠버에서부터 토론토, 그리고 그 너머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긴 대륙을 횡단한다거나, 동유럽 각 국을 돌아다니며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본다던가, 북유럽으로 떠나 차디찬 날씨와 오로라를 보고 싶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한국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낯선 이방인으로 한 달 정도 떠돌아다니며 내 바닥을 보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렇지만 여행이 고픈 마음을 내가 원하는 여행으로 허기를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간이 그렇게 허락해주지도 않고, 이제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다시 여행을 생각하면 몽글거리는 마음이 든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떠나기 어려워 '그래 그때 세상을 누리면서 참 재밌었는데...' 하며 쓴웃음을 짓는 것이 썩 나쁘지 않다는 것은 꽤나 다행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