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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묵 Mar 20. 2024

어쩌면 저 추운 날씨가 내게 말을 걸지도 몰라.

따뜻함을 좋아한다. 추운 어느 날씨를 뚫고 들어와, 등 따뜻하게 온수매트를 틀어놓고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을, 이리저리 쏘다니며 어깨 위로 얹힌 피로를 따뜻한 물로 씻궈내며 맞이하는 개운함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세상의 시끄러운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는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런 포근함을, 이제는 조금 안정궤도에 오른 것 같다고 느끼는 자만함을. 

그런 따뜻함을 하나씩 품어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평범함과 점차 가까워짐을 있는 힘껏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인간은 참 멍청하고, 미련한 동물이 아니던가. 나의 주변이 이제 조금 예열이 되었을 뿐인데, 나는 예열됨에서 오는 포근함을 잠시 느꼈을 뿐. 예열되면서 뜨겁고 무겁게 달궈진 공기가 조금은 답답하게, 그리고 이 포근함에 적응되어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제 정말 이렇게만 살면 되는 거라고?라는 생각과 함께.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이는 취업을 앞두고 이제 더 놀지 못한다는 두려움, 결혼을 앞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두려움과는 또 달랐다. 앞선 두 두려움은 기꺼이 맞이할 두려움이었다면, 이번 두려움은 글쎄 왠지 모를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 내가 가진 경험만으로 앞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맞는 걸일까. 


<헤르만 헤세 - 데미안>의 첫 문장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가 떠올랐다. 따뜻함을 누리고 싶었고, 따뜻함을 바랐었다. 그런데 겉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신경 쓰다 보니 내 속에서 무엇이 끓는지를 잊어버렸다. 이게 지속된다면 '내가 무엇에 끓었었지?'라는 고민에서, '어떻게 끓더라?'로 커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보게 되었다. 만 35세 이하까지 확대, 한 번에 2년까지 허용, 2번 신청 가능. 그러니까 합격만 한다면 총 4년 동안 캐나다에서 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모집공고를 보자 가슴속에 끓어오름을 오랜만에 느꼈다. 마침 내 나이로도, 그리고 여자친구 나이로도 함께 4년을 지원할 수 있었다. 서로가 워홀을 해보지 못했다는, 해외에서 살아보는 경험이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좋은 장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두 사람이 얼른 지원하자!라고 결정한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우리 가자!라고 외치고, 지원을 마치니 막연한 두려움들이 깊은 심해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 뭐 돼?', '이제 좀 자리 잡으려고 하는 것 같더니 그거 박차고 나간다고?', '가서 어떻게 적응할 거고, 영어는 어떻게 할 거고, 가서 어떻게 해결한다고 해도 돌아와선 뭐해먹고살 건데?', '지금 한 참 돈 모아서 내 집 마련 해야 할 때 아냐?' 등등... 평소에는 내 스스로에게 현실적인 질문을 안 했었는데, 막상 어딘가 풍덩 빠지려고 하니 속이 시끄러웠다. 그렇다고 달리 명쾌한 대답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조금은 외면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개월. 최종 워크퍼밋이 승인되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워홀을 왜 안 갔던 이유는 명확했다.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도 아니고,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공부하고 나중에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통장 잔고에 300만 원이 없어서였다. 어느 나라든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면 귀국 항공편이 있거나 혹은 통장에 300만 원 이상 잔고가 있어야 하는 것을 증명했어야 했는데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300, 많은 곳은 1,000만 원까지 증명해야 한다.) 나는 300만 원이 없어서 내 잔고를 늘 증명할 수가 없었다. 조금은 비루한 이야기긴 하지만, 경제적인 상황으로 나는 워홀을 미루었었다. 이제 통장 잔고는 채워졌지만, 다른 책임도 함께 채워지면서 선뜻 선택이 어려웠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더 무거운 책임이 나를 누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떠나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어쩌면 캐나다의 추운 날씨가 내게 말을 걸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렀다. 그게 어떤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모두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새롭게 도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늦기 전 새로운 곳으로 떠나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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