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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Aug 11. 2022

야상곡, 쇼팽

Ivan Moravec, Maria Joao Pires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고전음악계에서도 본연의 가치에 비하면 대중에게 덜 출되는 예술가들이 있을 터인데, 그 이유도 다양하겠다. Antonio Janigro, Lazar Berman의 경우처럼 시대를 잘못 타고나 활동 자체에 방해를 받은 경우도 있겠고, Carlos Kleiber처럼 온전히 스스로의 결정으로 대중과의 거리를 둔 경우도 있을 것이다. Johanna Martzy처럼 대중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음반 업계의 큰 손에 의해 커리어가 망가지기도 하고, Kathleen Battle처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 퇴출되기도 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고전 음악 역시 소비 시장이 필요하고, 열광하는 청중에 의지한 산업이니,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논리에 귀결되겠고, 그것이 현실화하는 방식 다양할 이다. 지난 20세기엔 이런저런 이유로 대중에게 저평가된, 혹은 조금 더 정확히는 Karajan, Horowitz, 혹은 Callas처럼 일반 대중의 상상력까지 자극하는 수준으로는 "뜨지" 않은, 그러나 훌륭하기 그지없는 예술가들이 물론 넘쳐날 터이다. 뒤늦게 Youtube를 발견한 작가에게는, 이들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는 것이 소소한 삶의 즐거움이 되었다.




유난히 입이 짧아 어릴 적 부모 속깨나 썩인 작가는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서도 편식이 심한 편이다. 대편성보다는 소편성에, 화려함보다는 단순함에 끌리, 그래서 몇몇 콘체르토와 교향곡, 그리고 한 손에 꼽을 만한 수의 합창곡들을 제외하면, 실내악, 그리고 그중에서도 솔로 기악곡을 선호한다. 자연스레 피아노 작품들이 그 주된 소비 대상이 된 셈이다. 그 안에서도 몇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을 붙이기 어려웠던 작곡가로는 대표적으로 모차르트와 쇼팽이 있는데, 특히 이들의 중/대편성 기악곡은 한자리에 앉아 끝까지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연주자를 찾아다니는 데에도  영향을 주는데, 그래서 모차르트/쇼팽 전문가들이 대부분 낯설다. 다행히도 Youtube의 근본을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이렇게 무지한 나를 간혹 일깨워 주곤 한다. 최근 그렇게 발견한 보석들이 Ivan Moravec (이반 모라베츠)와 Maria Joao Pires (마리아 주앙 피르슈)라는 피아니스트들이다.


Ivan Moravec는 쇼팽과 드뷔시 등의 연주로 특히 잘 알려진 체코 출신의 피아니스트이다. 쇼팽의 가장 위대한 해석자로 알려져 있고, 특히 그의 1965년 녹턴 녹음이 유명하다. 연주 속에 조용히 빠져들게 하는 한다는 면에서, 야상곡이라는 그 제목에 가장 어울리는 연주가 아닌가 한다. 그의 녹턴은 그 어느 부분에서도 과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듣고 있노라면 내가 숨을 쉬는 것조차 과도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연주이다. 간혹 사용하게 되는 "sublime"이라는 찬사가 이 음반에서 보다 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의 고전음악 편력은 베토벤의 실내악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는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어 혼을 빼놓으려 한다. 마지막 세 피아노 소나타처럼 뒤를 돌아보는 작품들이 없지 않으나, 이는 예외에 가깝다. 그 선동적인 열정이 피곤해질 때쯤 바흐를 발견하고, 평균율과 푸가의 예술이 주는 해석적인 소리에 빠져들지만, 그리고 그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선동하지는 않지만, 듣는 사람의 혼을 빼놓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Moravec의 녹턴은, 그러나, 스스로를 잊는다기 보다는 음악을 듣고 있다는 자체를 잊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그의 녹턴을 듣다 보면 피아노라는 악기의 무궁무진함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악기에서, 그리고 간혹은 하나의 작품으로 이처럼 다양하고 각기 다른 의미에서 아름다운 음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조금 진부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는 생전에 "Poet of the Piano"으로 불렸다고 하고, 녹턴은 이 수식어를 100% 이해하게 해주는 음반이다.  


Moravec은 녹음된 본인의 연주를 좋아했다고 한다. 콘서트와는 달리 100% 소리에 집중할 수 있고, 청중들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기 때문에... 본인의 연주 녹음을 듣고는 "Now I have my piano lesson"라고 말했다는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의 내용에서 그 겉치레 없는 성정을 엿볼 수 있다. 피아노 튜닝도 본인이 직접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연주와 녹음에 얼마나 많은 준비를 기울였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당대의 다른 연주자들에 비하면 많지 않은 수의 음반이지만, 하나하나 아름답고 완벽하다.




앞서의 긴 사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마치 무명의 연주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역시 위의 변명처럼 이 두 연주자는 모차르트와 쇼팽을 잘 듣지 않던 내게 와닿을 계기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터이다. 포르투갈 출신Pires는, 특히, 알고 보면 20세기 후반 피아니스트로는 Martha Argerich와 견주어지는 유명세를 가진 아티스트이다.

Pires는 모차르트 소나타와 콘체르토들로 워낙 유명하고, Deutsche Grammaphon과 Erato에서 나오는 여러 전집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들여놓았는데, 작가의 편식 해소에 매우 도움이 되고 있다. 고전음악 애호가들이 베토벤에서 시작해서 모차르트에 귀결한다는 말들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음반들이다. 거기에,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들, 즉흥곡들, 그리고 쇼팽 음반들이 아름다운데, 작가는 Pires 역시 쇼팽의 Nocturnes으로부터 만났다.


손열음의 녹턴이 내 인생 앨범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굴드에서 시작해 평균율 음반을 쓸어 모았듯이 쇼팽의 Nocturnes을 찾아다니다 보니, 사실 이들 두 연주자들은 만나는 것은 시간의 문제 이긴 했다. 손열음의 Nocturnes가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포함되어 조금 더 화려하고 하모니가 아름다운 것에 비해 Pires의 Nocturnes는 원래의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솔로 버전이다. 그리고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다는 말은 어쩌면 Pires의 연주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Pires는 라이브 콘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라이브 연주를 선호하고 음반 내는 것을 극도로 가리는 Zimerman 같은 부류가 있는가 하면,  Gould처럼 아예 콘서트는 끊고 리코딩에만 전념하던 연주가도 있는데, Pires는 후자에 가까운 모양이다. Gould와는 달리 음악회라는 딱딱한 제도의 불편함을 참아내기는 하지만, 결코 즐기지는 않는...




이런 그의 성향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온라인에서 Pires를 찾아보면 사실 믿기 힘든 일화를 하나 마주하게 된다. 1999Concergebouw와의 콘서트 이야기인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d minor, K.466의 협연이 Riccardo Chailly 지휘 아래 예정돼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이야기가 약 5분의 영상으로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데, 아마도 open rehearsal 내지는 이른 오후의 informal concert 인 듯 하지만 스테이지에서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는 카메라에서는 청중으로 가득 찬 객석이 지휘자 너머로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fS64pb0XnbI 


관현악단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하는 Pires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소를 하기도 하고, 바닥과 피아노를 번갈아 보, 지휘자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통 상황이 아. Chailly 려를 하, Pires는 깊은숨을 쉬고, 눈을 감, 절망이 그리고 결심이 차례로 얼굴을 스친다. 무슨 일이냐고? 전혀 다른 협주곡을 연주할 것으로 생각하고 준비해 왔다면? 닉과 혼돈을 거쳐 2분여 후부터 연주를 시작한 Pires가 30분 가까운 공연을 무사히 마친 이 이야기는 한참 뒤 위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https://www.classicfm.com/artists/maria-joao-pires/

이 일화는 흔히 그의 연주가로서의 완벽함을 말하는 데 사용되기는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데 더 가깝지 않을까? 물론 20번 d minor 콘체르토는 가장 널리 알려진 모차르트의 작품 중 하나이고, 당시 이미 수십 년의 경력을 가진 Pires가 십여 차례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연주했을 그런 작품일 것이니 그의 대뇌 어딘가에, 그리고 그의 근육에,  악보는 어느 정도 각인되어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과연 청중으로 가득 찬 홀에서 단 2분의 시간 만에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그 대작을 연주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일일까?


청중을 앞에 두고 무언가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경험했을 법한 흔한 악몽의 소재이고, 작가 역시 밤 사이 이런 종류의 꿈을 꾸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리 쉰 경험이 없지 않다. 특히 스스로 조절이 가능한 독주도 아니고 관현악이 먼저 치고 나가는 협연이었음에, 상상만 해도 등골이 시원하다. 사실 연주가 시작되고도 Pires의 불안한 마음은 지휘자를 바라보는 그 표정에서 그대로 보인다. 그 짧은 시간에 자세를 가다듬고, 그 작품을 연상하고, 감정을 끌어올리고, 이 모든 것을 이미 연주를 시작한 오케스트라에 맞추어할 생각을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Pires라는 연주가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청중은 흔히 Karajan과 Horowitz급의 명성을 가진 연주자들을 찾아다니지만, 개개인에게 의미 있는 예술적인 가치는 이런 이름값과는 다른 것일 터이다.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전 세계적인 이름들이 있는 반면, 이런 종류의 명성과 상관없는 내재적인 가치를 가진, 그리고 어디엔가는 그들을 알아보는 음악가들과 청중이 있는, 그런 보석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들을 찾아내어 듣고 기회가 되는대로 감사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음악적인 재능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작가와 같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인터넷을 달군 임윤찬의 반 클리번에서의 연주를 들으면서 한 생각이,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이다. 산속에 혼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 없음을 잘 안다는 이 조숙한 천재를 보면서, 어쩌면 이 세상에는 이런 훌륭한 재목들이 넘쳐나는 게 아닐까, 다만 그들을 제때에 알아보는 안목이 모자라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임윤찬 본인의 말처럼,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열정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연주 활동 사이에서 적절한 선을 찾아내고, 그 밸런스 안에서 꾸준히 성장하는 방법을 찾아내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가까이 있는 그이기에 그나마 청중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더 있기를 기대하며... 음반을 사고 연주회를 가는 것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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