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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Dec 19. 2023

맞음과 옳음

오랜만의 물리 이야기입니다. 새롭지는 않습니다.


며칠 전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과 수다를 떨다가, 설명충의 본능이 또 튀어나와 한 세기 전의 물리학 상황을 장황히 늘어놓는 짓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물리학이 당면한 근원적인 문제가 150년 전 당시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그리고 그 문제들이라는 게  통상적인 과학의 문제들과 상당히 다른 관념적인 것이었다는 말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물론 의도한 바 대로 제대로 전달되었을지, 적지 않은 의구심이 남습니다. 돌아 나오면서 이게 그리 복잡하게 할 이야기였나 반성을 하고, 혼자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역시 글로 써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 그래서 몇 안 되는 독자들은 "기미상궁" 신세가 되실 모양입니다.




흔히 일반 강연을 하다 보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는 둥 하는 말을 듣기도 하고 스스로 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과도한 말들이다. 뉴턴 역학은 정말 잘 맞는다. 위성 쏘아 올리는데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고, 일식과 월식의 예측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뉴턴 역학의 한쪽 면을 계승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다른 반쪽의 후예인 양자 역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주 잘 맞는 과학체계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한없이 가장 근원적으로 올바른 체계로 살아남을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과학이 잘 맞지만 실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세기 뉴턴 역학은 절대적으로 잘 맞는 이론 체계였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이는 전자기 이론의 도래를 거쳐 일종의 위기를 맞이하였고, 결과적으로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이라는 두 가지 독립적인 패러다임에 의하여 대치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이다. 수성의 근일점 이동, 즉 타원궤도의 타원 자체가 조금씩 돌아가는 효과가 있는데 이는 다른 행성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뉴턴역학의 계산 결과와 관측값 사이에 있던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게 워낙 복잡한 계산이었을 것이고 그 차이라는 것 역시 경천동지 할 큰 것이 아니었으니, 이 때문에 역학체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학자들은 거의 없었을게다.


뉴턴 역학에 대한 근원적인 의구심은, 하지만 이런 구체화된 과학적이고 관측적인 문제가 나타나기 한참 전에, 그리고 맥스웰의 전자기론 이론과의 상충으로 표면화되고 정량화되기 이전부터, 그리고 양자적인 물질세상의 모습이 그 진면모를 드러내기 한참 전부터 있어왔다. 이는 조금은 현학적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꽤나 상식적일 수도 있는 질문 하나에 연유한다.




독자들이 만유인력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다면,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말까지는 기억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멀리 있는 천체는 작은 힘으로, 가까이 있는 천체는 더 많은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지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다. 물론 왜 하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이냐는 물론 중요한 질문이고 이제 현대물리학에서는 구체적인 설명까지 가능한 것이지만, 뉴턴 시대에는 그저 "자연이 그렇게 만들어진 거니까" 정도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케플러의 태양계 모델을 완벽히 수학적으로 재구현한 뉴턴의 계산을 보고 나면, 이 만유인력과 뉴턴 역학이 맞는다는 것을 의심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따라온다.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이 만유인력을 이야기할 때, 그래서 이를 사용해서 케플러의 태양계 모형을 확인했다고 말할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천체와 천체 간의 "거리"에 대한 단순한 의문이다.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의 거리를 말하는 것인가?


고대 문명조차 이미 천체가 움직이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것이 케플러의 시대가 되면 지구 자체 역시 움직이는 것임이 어느 정도 각인되기 시작하였을 터이다. 아니라면 뉴턴이 그의 계산들을 할 이유가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투수가 공을 던지면 당연히 공과 투수의 거리는 일정하지 않다. 매우 빠른 속도로 그 거리는 멀어져 간다. 물체들 간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역학이니, 이렇게 시간에 따라 위치가 변하는 물체들 사이의 거리를 수식에 넣으려면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태양과 지구 혹은 지구와 달의 거리는 어느 정도 일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가끔 뉴스에서 슈퍼보름달이 뜬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터이다. 달이 지구 주변을 공전하는 방식이 완벽한 원궤도가 아니고 타원이라서 때로는 멀고 때로는 가깝기 때문에 간혹 달의 크기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커지는 현상이 있는 것이고, 이 역시 이제는 어느 정도 상식의 범주에 있는 이야기이다.


태양과 아주 먼 곳에서 떠돌다가 몇십 년, 몇백 년에 한 번씩 태양계의 안쪽 행성들 부근을 지나가는 혜성들을 생각하면 거리가 시간에 따라 빠르게 변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사실이다. 타원이라는 것이 긴축과 짧은 축이 있는, 수성의 경우 약간, 핼리 혜성의 경우 많이, 찌그러진 원이라고 생각하면 되니, 이는 천체와 천체 사이의 거리는 시간에 따라 상당히 빠르게 변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매우 빠른 속도로 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즉 시간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만유인력을 정하는 "거리"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와야만 다. 물론 이에 대한 답 역시 그 당시부터 있어 왔다. 뉴턴의 답은 매우 단순히 "지금 이 순간"의 거리이다. 매 순간마다 지구의 위치와 달의 위치는 비교해서 거리를 재면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게 만유인력이 지금 이 순간 작용하고 이를 뉴턴역학에 집어넣고 매 순간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지구와 달이 서로 움직여 가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물질이라는 것의 정체에 대한 이해는 단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는 게 사실이다. 원자라는 말은 떠돌고 있었지만, 그게 실제로 무슨 말인지, 실체가 있는 말인지, 그리고 원자 자체가 가장 근원적인지 등에 대한 그 어떤 질문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이다. 지구와 달과 태양의 움직임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이 천체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그리고 왜 태양은 뜨겁고 달은 차가운지 아무런 설명도 불가능했던 게 당시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라는 것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실체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유인력과 같은 힘이 왜 생기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이보다도 한층 더 어려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당구공 같은 물체들이 서로 부딪히고 서로 튕겨서 나가는 것이야 이들이 서로 만나서 밀어냈으니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물론 이 역시 그저 당연해 보일 뿐, 알고 보면 양자역학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이건 어떤 물리적인 것이 두 천체 사이의 거리를 아무런 시간차 없이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사실 그 답이 아득하다. 왜냐하면 만유인력에서 이야기하는 거리는 흔히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평균 1.5억 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는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매 순간 전달해 내어야 만유인력은 뉴턴의 생각처럼 작동할 터인데, 과연 무슨 방법으로 이 정보가 교환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뉴턴의 만유인력이 가진 이런 부조리한 부분을 일컫는 말이 "원격작용"이다. 힘 역시 물질들만큼이나 명확히 보이고 느껴지는 현상이었으니, 물질에 "원자"라는 근원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힘에도 이를 구동하는 무엇인가 물리적인 실체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점진적으로 과학자들의 인식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잘 맞는다 하더라도 "원격작용"이 가진 부조리함은 피하기 힘든 문제였을 것이다.




맞는 "장난감"을 가진 과학자들은, 당시에 그랬듯이 대개 이런 어려운 질문을 한동안 외면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를 환원주의라는 때로는 모욕적으로 사용되는 말에 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추구하는 것이 이렇게 말 하나로 폄훼될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점진적일 수는 있어도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잘~~  맞는 뉴턴역학을 뒤집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물론 150년 전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이다. 빛이 파동임을 공식화하고, 파동의 유한한 속력이 법칙의 일부로 녹아들게 되면서 뉴턴의 역학체계 그리고 그의 만유인력에 대한 의구심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건이다. 그 당시 알려진 자연의 힘은, 전기력, 자기력, 그리고 중력인데 알고 보니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라는 하나의 몸통을 공유하고, 또한 광속이라는 유한한 전달 속도를 가진 무언가 물리적 실체를 가진 것에 의해 구동된다는 것이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만유인력과 그 뜬금없는 원격작용이 갑작스레 천덕꾸러기가 된 게다.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20세기초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은 이렇게 비이성적이지만 쉽고 잘 맞는 만유인력을, 이성적이지만 훨씬 더 복잡한 일반상대론이라는 체계로 대치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새로운 체계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힘이 전달되는 방식이 빛이 전달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빛의 전달 속도와 같이 유한한, 실은 빛의 그것과 동일한 전달 속도로 전달되는, 무언가 힘을 전달하는 물리적인 실체가 있다는 말이다. 


두 물체 각기에 대해 언제를 기준으로 말하는 위치이고 거리이냐는 질문에 대한 좀 복잡한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상대론이 정해주는 새로운 그 답이 이상하지는 않다.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정하는, 매우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며 이성적인 답이 포함되어 있다. 최소한, 수천조 킬로미터 멀리 있는 별이 방금 초신성이 되면서 질량의 상당 부분을 잃어 어렸다는 사실을 지구가 "같은 순간, 동시"에 느껴야만 한다는 뉴턴의 주장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이 전자기이론은 이렇게 상대성이론의 초석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후 양자역학과 양자장론의 근간이 되기도 했는데, 이 상대성 이론의 전조였던 전자기 이론도, 상대성 이론도, 그리고  이후 곧 출현한 양자 역학도, 그 하나하나 뉴턴의 그것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고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는 더 많은 것을 더 이성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데 대한 반대급부일 뿐이다.


이성적인 게 더 쉽다고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고,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을 믿는다면 어렵다고 투덜거릴 일 만은 아니다. 쉽고 꽤나 잘 맞았던 체계를 졸업하고, 조금 더 어려워도 더 넓게 확장가능한 체계로 진학을 한 것이 한 세기 전에 만들어진, 현대 물리로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근데, 다른 데서도 대충이나마  적이 있는 이 이야기를 굳이 왜 다시 하는 걸까?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150년 전의 물리학 역사가 지금 어떻게 반복 중인가에 대해서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이 전자기이론의 도래와 함께 폐기되어야 했던 그 상황이, 150년이 지난 지금,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뉴턴역학과 전자기이론의 두 후예들 사이에 또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원격작용과 같은 류의, 실험 혹은 관측적 검증과 아무런 상관없는 관념적 부조리가 나타났고, 그것이 이 두체계의 충돌로 구현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부조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체계가 난해해진 만큼 그 안의 부조리도 설명하기가 어려워지겠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상대론적 지평이라는 특정한 장소들이 출현한다는 상대성 이론의 피하기 힘든 결론에 있다. 이 지평이라는 구조물은 세계를 두쪽으로 나누는데, 1. 우리가 사는 상식적인 외부, 그리고 2. 들어갈 수는 있어도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지평의 내부이다.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사실상 내부라는 곳이 실은 무한히 먼 미래라는 이상한 사실 때문인데, 이는 안전한 바깥에서 보는 입장에서의 이야기이고, 막상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체 입장에서는 지평을 통과하는데 유한한 시간만을 경험하게 된다.


흔히 양자 역학은 확률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이게 실은 매우 잘못된 이야기인데. 뉴턴역학의 방정식을 대치하는 양자 역학의 슈뢰딩어 방정식 역시 100% 인과적이다. 확률과 관련된 이야기가 출현하는 것은, 주어진 양자상태를 거시적인 우리의 입장에서 읽어내는 과정에서 인데, 우주 자체가 확률적이라는 둥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이런 확률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세계관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는 양자 상태를, 그보다는 매우 적은 수의 정보만을 다루는 고전적인 측정에 투영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양자정보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마치 컬러로 된 그림 파일을 흑백 프린터로 출력해 놓고서, 붉은색과 푸른색이 구별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근데 이건 프린터를 잘못 만든 우리의 잘못이지 원래의 색조 가득한 그림을 그린 작가의 잘못이 아니다. 나중에라도 컬러 프린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해결되는 문제에 가깝다.


그런데 상대론적 지평 안으로 넘어간 그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원래 상대론적 지평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다시는 볼 수 없다인데, 여기에 양자 역학이 첨가되면 생기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 그림을 결국은 되찾을 수 있지만 색이 빠져버린 흑백 그림만 되찾을 수 있더라는 식의 이야기이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 상대론적 지평 자체가 쪼그라들어 결국은 사라지는지에 대한 물리학적 예측이 포함되고 나면, 이는 곧 채색의 정보를 담은 주머니가 사라진다는 말로 연결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즉 컬러 프린터를 만들어낸다 하여도 그림의 원래 색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중력이 혹은 상대론적 중력에서는 필연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상대론적 지평이 말살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스티븐 호킹의 가장 중요한 물리학적 발견이긴 한데, 이런 자세한 이야기가 중요하지는 않다. 요점은 상대론적 지평과 이의 양자 역학적인 모습이, 물리적인 세상에게 인과율의 포기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과율이라는 것을 과거가 주어지면 미래가 결정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물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과율은 미래가 주어지면 과거도 역시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쌍방향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물리학적 의미의 인과율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인과율이라는 것이 과학적, 철학적 당위는 아닐 수도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실체가 많이 드러난 실제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특이하니 말이다. 실제로 엔트로피와 관련된, 통계역학적인 이유로 비가역적인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 위에서 이야기한 컬러프린터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실질적인 제한에 가깝지, 채색 정보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는 현저히 구별이 된다.


다만 문제는 뉴턴역학에서와 못지않게 잘 맞는, 그리고 한 세기 만에 현대 과학과 산업의 근간이 되어버린 양자역학에서도 이 인과율의 의미가 역시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인과율의 포기는, 양자 역학으로 한 계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는데, 즉 체계 자체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상대론적 체계와 양자 역학적인 체계가 충돌했다는 말의 진짜 의미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지극히 관념적이지만 그럼에도 물리학 체계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인 것이다. "원격작용"이라는 상대적으로 직관적인 문제의식에 못지않은 뿌리 깊은 의구심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실험을 설명하고 말고 하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실제 우주에 존재하는 "지평"의 경우 너무 복잡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어, 양자적 의미에서의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게 되다는 호킹의 예측을 실제로 관측해서 검증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이는 19세기의 실은 "원격작용"에 대한 논란과 닿아 있는데, 어디 멀리 있는 천체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있지 않은 한 원격작용이 옳은지 아닌지를 관측을 통해 확인할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는 의미에서이다.


흔히는 실험결과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현대 과학의 실험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모델과 이론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상한 결과물이 나왔을 때 오히려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수준에서의 문제가 때로는 더 해결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여기서의 인과율의 문제가 그런 것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래서 양자역학적인 인과율을 포기할지 상대성이론을 포기할지에 대한 기로에서, 150년 전의 물리학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유물론적이 세계관이 결국은 너무나도 잘 맞는 것 같았던 그리고 아직도 잘 쓰이는 만유인력의 원격작용을 파훼한 것처럼, 인과율이 우주 자체를 너무나도 잘 설명하는 상대성이론을 파훼할 때가 된 것일까?




20세기 물리학의 정교함은 사실 놀라울 따름이다. 너무나도 잘 맞는 체계들이고, 실험과 관측을 하면 할수록 이 사실은 공고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이 상대성이론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물리학적인 세상이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과학적의 의미에서도 "옳음"의 잣대로 "맞음"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있는데, 물론 최소한 한 세기의 단위로 있어온 일이다.


과학에서의 "옳음"은 물론 매우 위험한 말이다. 자연을 잘 설명하고 한 걸음 나아가 이용하게 해주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라면 "맞음"이 일단 중요하다. 하지만 오래 지속된 "맞음" 역시 때로는 "옳음"의 도전을 받게 되는데, 19세기 후반의 물리학이 그랬고 지금 21세기 초반의 물리학이 그러하다. 그리고 한참 전, 꽤나 잘 맞는 혹은 잘 맞게 너무나도 인위적으로 고안된 천동설의 모델이, 이성적이고 확장 가능한 지동설로 대치된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시대가 그랬다.


아주 가끔이어야 하지만, 충분한 의구심이 쌓이면, 과연 주어진 과학체계가 "옳으냐"를 묻는 일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충돌들은 관측적인 혹은 실험적인 반증이 쌓여 있느냐와 흔히 상관없는 그런 것일 경우도 적지 않다. 양자물리학적 의미에서의 인과율의 문제가 과연 21세기의 물리학에 다시 한번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게 될지, 그렇게 새로운 종류의 "맞음"에 대한 질문들로 연결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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