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균율 May 09. 2024

데보라, 데보라

영화와 소설 (3)


아래에는 Sergio Leone감독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인생 역작인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 대한 주요 스포일러라고 할 만한 이야기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적이 없으나 나중에라도 보고 싶은 분들은 반드시 여기에서 멈추세요. 이야기의 반전 자체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지만, 그래도 내용을 미리 아는 것이 도움이 될 리는 없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에서 제안한 "대부"의 감독직을 고사하기까지 했다니, 청중으로서 그 정도 예의는 갖추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한동안 쌓아가던 소설과 영화에 대한 단상들을 한꺼번에 발행 취소라는 방식으로 숨긴 적이 있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제 보면 별거 아니었던 것 같고, 한 동안 새 글을 쓸 여유도 없으니 그냥 심심풀이 삼아 하나 둘 되살려 볼까 합니다. 당시 가장 먼저 쓴 글 입니다.




작가는 대형 영화사가 만들어 내는 상업 영화들을 선호한다. 스타워즈 시리즈,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 기생충 등등... 나의 두 시간을 얻으려면, 그만한 노력과 비용과 시간을 들였어야 한다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사실 할리우드 영화들에 대하여 폄하하는 사람들도 많고, 일부 프랜차이즈들처럼 폄하되어 마땅한 영화들도 많지만, 사실 두 시간짜리 "드라마"를 가장 능란하게 만들어내는 곳 역시 할리우드이다.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자는 통에 유럽에 가는 길이면 편도 기준으로 다섯 편은 보고 나오는데, 최근에 그렇게 잘 본 드라마들 중에는 Ms. Sloane이 생각난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대형 상업 영화들에 감동이라거나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잠깐만이라도 실제의 세상을 잊게 해주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그래도, 이런 상업 영화 중에 그 완성도, 신선함, 그리고 아주 가끔은 감동까지, 어떤 잔상이 해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런 영화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혹시 상영되면 꼭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은 옛 영화들이 몇 있는데, 대표적으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Once upon a time in America를 꼽을 수 있다. 몇 년에 한 번 케이블 채널 서핑하다가 어쩌다 일부를 단편적으로 보던 것을 최근 맘먹고 vod로 다시 보았다. 그러고 나니 영화관이 더욱 간절한데, 물론 4시간이 넘는 복원판의 상영시간에 겁먹지 않을 영화관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실 이 영화에 끌리는 이유의 많은 부분은 “1920년” 아역들의 매력에 있다. 위 제목에 보이는 컷은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윌리엄스버그 브리지를 배경으로 (맨해튼 남부의 슬럼이 영화의 배경이지만 위 장면은 실제로는 브루클린 쪽에서 촬영했단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정장을 빼입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저 어린 나이에 마약 밀매상과 일을 시작하며 거금을 손에 넣었고, 곧 닥쳐올 비극을 예상치 못한 듯, 어른의 옷을 차려입고 즐거워하고 있다. 내가 본 모든 영화 중 가장 아름답고 처연한 장면이다.


오른쪽에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는 도미닉이 보이는데, 같은 아역들 사이에서도 유독 작은 이 아이만은 정장을 입지 않고 있다. 이렇게 차려입고 기차역에 돈가방을 보관하러 가는 장면을 유심히 보면, 도미닉은 문을 놔두고, 굳이 아주 작은 아이들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쇠창살 사이로 들어가는데, 감독의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마치 대놓고 울어버릴 준비를 하라는 듯... 도미닉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로 인해 누들스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을 미리 알고 보는 입장에서 가슴이 시리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 조금 앞서 나오는, 1920년을 여는 그 유명한 "데보라" 장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몽환적인 따듯한 색채의 불빛과 그 안에서 혼자 춤추는 데보라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 장면 말이다. 화장실 벽의 틈으로 건너편을 들여다보는 1968년 누들스의 시점이 1920년으로 바뀌고, 그 너머로, 데보라는 춤을 추며 인생을 꿈꾼다. 훔쳐보는 누들스를 간간히 흘겨보고,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빤히 알고서도 모른 척하며 도발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데보라의 모습, 당시 10대 초반이었던 제니퍼 코널리는, 첫 영화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다.


급히 쫓아 나온 누들스에게 바퀴벌레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는 어린 데보라는, 누들스를 좋아하지만 그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 답답하다. 이런 장면은 몇 번 더 보이는데, 혼자 있는 식당의 문을 일부러 열어 놓고 기대대로 따라 들어온 누들스에게 읽어주는 구약성경 아가서, 마치 연가와도 같은 구절 사이에 추임새처럼 섞이는 타박,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응해주는 입맞춤, 이런 데보라의 모습에는, 어린 사랑의 아련함과 단순한 누들스에게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담겨있다.


(제니퍼 코널리에 비해, 어른 데보라의 역할을 한 엘리자베스 맥거번의 존재감은 글쎄...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일부 조연들의 연기가 주연들을 충분히 받쳐주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되는데, 1933년의 데보라가 특히 그러하다. 연기 초짜인 코널리를 캐스팅한 이유 중 하나가 맥거번과 닮아서라니, 참 영화 만드는 거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는 맥스라는 훼방꾼이 있다. 맥스에게 끌려다니는 누들스에게 “어서 가버려, 엄마가 부르는데...”라고 비꼬는 두 차례의 장면이 보여주듯, 맥스와 데보라는 누들스를 사이에 둔 경쟁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결국은 그를 등지고 연인이 혹은 불륜이 되어 버리는데, 이는 누들스가 감내해야 하는 비극의 또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물론 누들스와 맥스의 이야기이다. 야심으로 가득 찬, 미래에 대한 철저한 계획이 있는 맥스와, 그저 내키는 대로,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그냥 동네에서 성공한 갱으로서의 인생에 만족하는 단순한 누들스, 둘은 결국 같이 갈 수 없고, 양립할 수 없는 두 삶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스스로의 종말을 감지하자, 죄책감을 안고 35년을 숨어있던 누들스를 불러내어 자신에게 복수를 하라고 강요하는 맥스의 모습은, 파국을 앞두고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맥스에게 누들스는 패배자일 뿐이며, 자신이 떠넘긴 멍에를 청산할 복수의 기회로 포장한 마지막 제안 역시 깔끔한 퇴장을 위한 자신만의 또 다른 일방적인 계획에 불과하다.


욕심과 야망을 위하여, 어린 시절부터 같이 한 친구들의 죽음을 계획하고 결국은 자신도 태워버리는 맥스나, 충동적이지만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택하는 누들스 모두, 현실을 필연적으로 과장하게 되는 영화 속 인물들 임을 감안하면 일상에서 어렵사리 볼 수 있는 종류의 인물들이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건 간에, 그 일이 그냥 즐거운 소수가 있고, 생계의 수단인 다수도 있는 반면, 어느 집단에 가건, 이를 통해 무언가 다른 욕심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역시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니 말이다.


물론 맥스와 누들스는 둘 다 어쩔 수 없는 건달이고 불량배이다. 1990년대를 풍미한 모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누군가가 독백처럼 하는 말이 있다. "그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맥스의 제안을, 아니 맥스의 존재 자체를 차갑게 무시하고 떠나는 누들스의 모습에서, 최소한 그에게는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데, 작가의 경우 정작 궁금해지는 것은 데보라이다. 과연 데보라는 어떤 사람일까? 데보라는 할리우드로 떠난 30여 년 후, 누들스를 다시 만난 그때까지, 어떻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항상 남는 의문이다.


사실 영화의 끝까지 맥스가 데보라와 하나의 카메라 안에 들어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누들스가 데보라를 훔쳐보던 같은 자리에서, 그 둘의 입맞춤을 훔쳐보았다는 암시가 전부이다. 그럼에도, 맥스가 데보라를 결국 쟁취할 것은 영화 내내 암시된다. 차례로 누들스를 지나간 여인들을 취하는 맥스에게, 그리고 누들스의 모든 것을 앗아간 맥스에게, 데보라는 그 마지막 트로피임이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서 데보라는 맥스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긴 하다.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고 야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 야망이 맥스처럼 파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으나, 어쨌든 단세포적인 누들스보다는 맥스와 더 비슷한 사람이다. 누들스가 말하듯, 젊은 맥스와 데보라가 서로 싫어하는 것은 사실은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궁금증이 남는 것은 단순히 어린 코널리가 보여준 당차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모습과, 차가운 욕망이 떠오르는 맥거번의 모습 사이에 느껴지는 괴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코널리의 데보라 안 어딘가에 숨겨 있던 혹은 제어되던 그 강한 욕망이 맥거번의 데보라 전면에 올라온 것은, 미숙하고 단순 무지하며 믿을 수 없는 누들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맥스의 기만에 의해 꼬여버린 누들스의 인생만큼이나, 누들스의 폭력에 의해 데보라의 인생 역시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닐지......


어쩌면 데보라는 이 이야기 안에 있는 유일한 보통사람 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하기도 하며, 열심히 자기 꿈을 좇아가다가도 현실에 주저앉기도 하는 그런 보통 사람 말이다. 혹시 감독은 한 두 단어로 설명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주변 사람들과 그리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나이와 함께 스러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있고, 그리고 나이와 함께 한층 더 추해지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어리고 젊었던 시절의 실패와 실수는 나를 키워주기도 하고, 나를 둥글게 깎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나의 비뚤어진 부분을 감추고 있던 그 가림막을 찢어 놓기도 한다. 시간과 함께 쌓이는 경험과 기억은, 나의 존재를 중화시키기도 하지만, 나의 희미하고 감추어져 있던, 한 때는 부끄러워했을 구석들을 훨씬 더 또렷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들스나 맥스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더라도, 한 인생에 가끔씩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들이 지나면, 그때마다 나의 실체가 그리고 그 이후의 내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데보라의 어느 모습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일지 스스로 알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