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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Nov 23. 2024

Ted Chiang과 SF문학에서의 예지

영화와 소설 (6): Story of Your LIfe


오늘은 Ted Chiang의 Story of Your Life라는 단편에 대한 이야기  볼까 합니다.Villeneuve라는 걸출한 감독이 Arrival이라는 제목으로 각색하여 영화화한 그 단편소설인데, 한국에서 개봉할 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컨택트'라는 제목을 사용했던 이 영화는 유명한 원작 소설을 뛰어넘었다고 생각되는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원래 이 글은 Frank Herbert와 Ted Chiang이라는 전혀 다른 두 SF작가를 동시에 소개하는 글로 한참 전에 올려놓았던 것을, 이후에 각각의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둘로 분리결과물이었습니다. 특히  후반부 Ted Chiang에 대한, 인문학자 몇 분들을 청중으로 하는 발표를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그래서 독후감을 조금 벗어나는, "예지"와 "시간"이 SF문학에서 사용된 이런저런 예시들이 더 들어 있습니다.


아래 글에는 Ted Chiang 원작의 주요 문장들이 인용되었고, 또한 작품 자체가 길지 않다 보니 스포일러로 가득한 셈입니다. 영화 혹은 소설을 접해본 적이 없고 나중에라도 새롭게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이 글은 건너뛰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글 역시 발행을 취소하였다가 다시 올리는 내용입니다.




Science Fiction이라면, 과학적인 호기심에서 파생되는 상상력들이 주된 소재로 사용되는 문학을 의미할 터인데, 막상 글로서 현신하는 방식은 작품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예를 들어 Isaac Asimov는 로봇과 그 로봇의 행동을 제어하는 3개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기본적인 축으로 삼은, SF를 빙자한 추리소설에서 시작하여 Foundation 시리즈처럼 하나의 독립적이고 아주 먼 미래의 세계관에 도달했다면, Kim Stanley Robinson의 Mars삼부작은 ‘화성으로의 인류의 이주’라는 멀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 안에 온갖 정치적 사회적 이야기를 담아내어 어쩐지 낯설지 않은 세계관을 창조해 냈다.


대형 SF작품들은 이렇게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물론 흔히 장르 문학이라고 부르는 무협, 판타지 등과 공유되는 면이기도 하다. 매우 다양한 글의 수준은 잠시 잊고 그 구조적인 공통분모 만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무협의 대명사인 김용의 과거 중국의 왕조들 안에 존재하지만 실제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강호, 판타지 장르의 원조격인 J.R.R. Tolkien과 Ursula Le Guin의 중간계와 Earthsea, Philip Pullman의 Magisterium, Frank Herbert과 Isaac Asimov의 수 만년 후 인류의 범은하적 제국들 등의 설정 등이 모두 이런 문학적인 세계관에 포함된다. 이들은 각기 완벽히 창조된 세계들로 서로 다른 신화와 피조물, 과학과 종교들이 주어진다.


사실 장르 문학에서는 이런 작가만의 세계관이 창조되고 독자에게 전해지는 문학적 방식에서 작품의 깊이가 쉽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장편 혹은 시리즈의 모습으로 충분한 공간이 주어진 경우에 가능한 일이고, 단편을 고집하고 있는 Ted Chiang의 경우 세계관이 주어지고 사용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20세기 중반에 나타난 SF들 역시 대중 잡지들에 실리는 단편 들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긴 한데, Chiang의 경우 이런 과거 사례들과 비교해도 SF적인 소재를 녹여내는 방식이 특이하다.


이는 Tower of Babylon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하늘과 소통하고자 탑을 만들어간다 그 오래된 문명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안의 무명의 일꾼들의 이야기인 듯 시작한다. 하지만, 그 “하늘”에 실제로 닿았고 그 하늘 문을 열어보니 지표면의 다른 곳 어딘가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는 반전은 갑작스레 독자들을 미지의 세상으로 데려간다. 일반 상대론 도래 이후 흔히 회자되는 웜홀이라는 개념을 차용한 것인데, 사전 정보가 없이 이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갑자기 글의 장르가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이 짧은 이야기가 함축하는 여러 가지 의미 역시 적지 않은데,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른 곳이 아니었다는 그 마지막에 방점을 둔다면 온갖 종류의 종교적, 철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해 준다. 물론 단편만의 매력, 즉 독자에게 남겨주는 공백이 가지는 그 매력 때문에 그 파괴력은 더욱 극대화된다. 단편이라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세계관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된다면 세계관 자체가 반전의 역할 하는 셈이다.  




이에 비하여 Story of Your Life는 마치 더 현실에 뿌리를 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시작한다. 남편과는 멀어지고 자식과는 사별하여 혼자가 된 언어학자 Louise Bank의, 시제가 좀 뒤틀린 듯한 독백들로 시작하는데, 초입에 있는 물론 그 가장 중요한 예는 다음에 있다.  


The request for that meeting was perhaps the second most momentous phone call in my life. The first, of course, will be the one from Mountain Rescue. At that point your dad and I will be speaking to each other maybe once a year, tops. After I get that phone call, though, the first thing I’ll do will be to call your father.


He and I will drive out together to perform the identification, a long silent car ride. I remember the morgue, all tile and stainless steel, the hum of refrigeration and smell of antiseptic. An orderly will pull the sheet back to reveal your face. Your face will look wrong somehow, but I’ll know it’s you.


“Yes, that’s her,” I’ll say. “She’s mine.”

You’ll be twenty-five then.


하지만 이는 사실 알고 보면, 갑자기 나타났다 또 갑자기 사라진 외계인들과의 조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외계 비행선들이 지구 곳곳에 나타나 "주차"를 한다. 그 안에서 만난 7개의 다리를 가지는 외계인 Septipod 들과 소통을 위해 불려 간 언어학자 Louise Bank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그 언어가 단순히 생각과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Usually, Heptapod B affects just my memory: my consciousness crawls along as it did before, a glowing sliver crawling forward in time, the difference being that the ash of memory lies ahead as well as behind: there is no real combustion. But occasionally I have glimpses when Heptapod B truly reigns, and I experience past and future all at once; my consciousness becomes a half century-long ember burning outside time. I perceive—during those glimpses—that entire epoch as a simultaneity. It’s a period encompassing the rest of my life, and the entirety of yours.


외계인의 문자형 언어인 Heptapod B는 시간의 흐름 자체를 담아내는 또 다른 그릇이었고 이를 습득하는 행위는 곧, 이미 경험했고 앞으로 경험할 시간의 연속선을 동시에 인지하게 해 준다는 설정이다. 이 발견은 인류의 문명에 새로운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방성 입장에서는 아무런 소득 없이 지나간 것처럼 보인 외계인과의 조우였으나, 남겨진 진정한 선물이 실은 그들의 언어였다는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인류의 이후 미래에 대한 시사점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Chiang은 그런 거대담론에는 관심이 없다. 이야기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래의 비극을 알면서도 뚜벅뚜벅 살아가는 Louise Bank의 현실에서 끝을 맺는다. 선물처럼 찾아왔다 가버릴 딸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독백하고 있는 것임을 이해하고 나면, 그 반전에 독자들은 한동한 멍하니 생각의 꼬리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두 눈에 보이는 공간을 대뇌가 그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동시에 인식하듯이, 옳은 언어를 배우면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시간의 연속선 전체를 한꺼번에 인식할 수 있다는 이 상상력은 Chiang을 SF계의 기린아로 만든 결정적이 계기가 아닐까 한다.


사실 타 영장류와 대비되는 인간의 인지 능력은 언어의 발전과 함께 한 게 아닐까? 인류 문명이 꽃피운 것에 자연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아직 연구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사실 수학을 일종의 언어로 생각하고 수학이 담는 현대 물리학에 인간의 자연어가 얼마나 부족한 매개체인지를 알고 나면 효과적인 언어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20세기 물리학 안의 온갖 이상해 보이는 자연현상들도, 적절한 수학의 체계 안에 담고 접근해 보면 생소할 수는 있어도 전혀 이상하거나 환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조금의 문학적인 상상력을 더하다 보면 Chiang이 상정하듯이 시간을 한꺼번에 보는 언어가 존재하고, 그런 언어를 습득하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존재도 미래를 지금 경험할 수 있다는 설정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편, 단편집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의 말미에는 작가 본인이 Heptapod B라는 장치로 구체화한 생각, 즉 물리 현상이 실은 인과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소회를 써 놓았다. 역시 물리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작품 중반에 중요한 전환점을 주는 장치로 사용되기도 한 Fermat의 최소 시간의 원리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는 Variational Principle (변분 원리) 혹은 Action Principle (작용원리)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대학 수준의 물리학을 배우다 보면 몇 번의 큰 혼란을 겪는 지점이 있는데, 그중 가장 첫 번째가 이 작용원리이다. 원래 뉴턴의 운동 방정식은 최초의 위치와 속도, 그리고 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주면 그 궤적이 인과적으로 완전히 정해진다는 이야기를 수식으로 담고 있는데, 18세기가 되면서 이 동일한 궤적을 유도하는 전혀 달라 보이는 방법론이 나타난다.

“시작 지점 A에서 시작하여 종료 지점 B까지 어떤 궤적이 뉴턴 역학에 의하여 구현되느냐”라고 조금 다른 질문을 하면 뉴턴 방정식이 정하는 궤적이 항상 "작용" 혹은 Action이라고 부르는, 궤적 전체를 알아야 계산할 수 있는 물리량을 최대화 혹은 최소화한다는, 조금 더 일반적으로 극한화 한다는, 원리이다. 여기서 “극한”이라는 말은 이 실제 궤적으로 계산한 Action과 주변의 살짝 다른, 실제로는 구현되지 않는 궤적의 Action을 비교했을 때 그 값이 거의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철저히 인과적인 고전 물리학을 사용하여 물체들의 궤적을 풀어놓고 나면,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그 궤적 전체에 의해 결정되는 "작용"이라는 수학적인 양을 최소화, 최대화하는 결과론적인 성질을 갖는데,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치 물체가 미래의 여러 궤적을 알고 미리 계산을 한 후 “극한”에 해당하는 최적화된 궤적을 정해 따라가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고, 이 사실을 처음 접하면 마치 물체들이 자신의 미래를 알고 움직이는 것인가? 하는 착각에 흔히 빠지게 된다. 특히, 마치 인과성과 배치되는 듯 느껴지는 이런 원리가 왜 뉴턴 역학에서 굳이 성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의구심은 여전히 남게 된다.


이 사실에 대한 고전 역학의 산술적인 설명 말고도 더 근원적이고 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은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알려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전 역학의 근저에 양자 역학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실은 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 사실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과 학자들이 적지 않으니, 여기에서 길게 설명하는 것은 적절 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다. 궁금한 그리고 용기 있는 독자들에겐, 작가가 한참 전에 써 놓았던 물리이야기 하나를 추천한다. 


물론, Story of Your Life의 성공은 이 Action 원리에 대한 이런 과학적인 그리고 철저히 인과적인 설명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상상력에 근거한다. 즉 물리학의 법칙 자체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시간의 연속선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다는 착각에 근거하고 있지만, 문학의 소재로서의 관건은 물론 과학적인 판단에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동시성을 캐내는 옳은 언어를 학습하면 시간이 반드시 선형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그 제안에 대하여 독자들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공감해 주었는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일 터이다.


이런 SF적인 상상력을 반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사실 작가의 입장에서는 큰 모험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독자들의 공감을 순식간에 이끌어내지 않으면 반전이 아닌 혼란으로 끝을 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Story of Your Life에서의 작용원리, 혹은 조금 더 정확히는 이 원리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시간에 대한 의구심의 문학적인 장치로서의 가능성을 알아챈 Chiang의 선구안, 그리고 이를 지극히 개인적인 독백에 녹여낸 그 재능이 놀랍다.




시간에 대한 의문들은 물론 물리학자들에게도 많은 혼란을 주는 주제이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한지, 혹은 조금 더 근본적으로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열 명의 물리학자에게 물어보면 다들 조금씩 결이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항상 그 양이 늘어나기만 한다는 엔트로피가 시간의 방향성을 정한다는, 일부 물리학자들의 비교적 잘 알려진 주장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는 결국은 원래의 질문과 별 상관이 없는 재미있는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뿌리 깊은 호기심에 비하여 이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전혀 없는 점은 역설적으로는 문학적인 장치로서의 시간의 개념이 얼마나 유용했는지를 시사하는데, 이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에서의 극적인 장치로 사용되는 시간 여행들에서도 엿보인다. 시간 여행이라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구현되는 경우들에 비하여 Story of Your Life에서는 이보다는 피동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더 파격적인데, 과거와 현실과 미래가 구분되긴 하지만 이 모든 연속선이 동일한 선상에서 하나의 “기억”안에 담길 수 있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미래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SF작품이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 Frank Herbert의 Dune시리즈이다. Dune의 경우 The Lord of the Rings에 버금가는 완벽한 세계관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장편과 단편, 더구나 세계관에 의존하는 Saga와 단편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겠지만, 시간의 연속선 전체를 “기억”의 범주에 집어넣는 이 중요한 장치를 두 작품이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Story of Your Life에서 Heptapod B가 시간의 연속선을 “기억”의 범주에 끌어오는 역할을 하였다면 Dune에선 Spice라는 일종의 마약이 그 역할을 한다. Spice를 통한 단기적이고 제한적인 예지력은 이 세계관의 중요한 일부로 처음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데, 1만 6천 년 전에 있었던 Butlerian Jihad와 그 이후 생기게 된 Thinking Machine에 대한 터부 때문이라고 서술된다. 은하를 배경으로 하므로 항성 간의 우주여행이 가능해야 하는 세계관이지만 컴퓨터가 금기시되는 이 사회에서는 안전한 항성 간의 여행을 위해서는 Spice를 통한 단기 예지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지력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결국 은하 제국과 인류의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초인의 출현에 연결되는데, 그는 이 세계관 안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막강한 단체인 Bene Gesserit들이 Kwisatz Haderach이라고 부르고 계획하는 메시아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의 계획과는 현저히 어긋나게 되지만 말이다.




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인 철학적 화두는 물론 자유의지이다. 각기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억 속의 미래를 바꿀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 역시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인류의 멸절을 피하기 위해 Golden Path라는 무자비한 짐을 스스로 짊어진 Atreides들의 선택과 본인이 미래에 겪게 되는 아픔을 의심의 여지없이 알고 있음에도 그 삶을 묵묵히 살아간 Louise Bank의 선택은 둘 다 기독교 문화권의 오랜 철학적인 명제 "자유 의지"에 대한 이야기임이 명백하다.


Atreides의 선택 안에는 인류의 생존이라는 거대 담론이 들어 있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비극이기도 한다. 수천 년이 지나면서 반인-반Worm이 되어 버린 독재자 Leto Atreides II의 삶과 그 마지막은 Dune 시리즈의 거대한 서사에 걸맞게 인류 문명 자체를 바꾸어 놓는 사건이지만, 한 개인의 비극으로서는 Louise Bank의 그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 그 누구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사실상 없었다.


그 미래가 과학적인 의미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지만, 사실상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필연을 거부하지 않고 본인이 “기억”하는 미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에 대한 Louise Bank의 의지에 대하여 작가 Chiang이 말하고 있다면, Herbert의 경우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자유의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필연일 수밖에 없는 메시아적인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Atreides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라는 것은, 그 선택의 가능성 때문에 Louise Bank의 그것보다 어쩌면 더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예수의 대속에 대하여 이를 피하는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이 고난의 길을 걸었다는 종교적인 “캐논”을 통하여 한층 고양된 가치를 부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Louise Bank의 절절한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 조금 더 결정론적인 색채가 강한 이 Ted Chiang의 이야기는 물론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느냐는 해묵은 논쟁에 결이 닿아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런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명제가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는 것은 물론 아니겠다.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20대의 나이에 스러질 딸을 “기억”하는 어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극에 다다를 것이 명확한 미래의 인생을 회피하지 않는 그 의연한 모습에 있을 것이다.


Working with the heptapods changed my life. I met your father and learned Heptapod B, both of which make it possible for me to know you now, here on the patio in the moonlight.  Eventually, many years from now, I’ll be without your father, and without you. All I will have left from this moment is the heptapod language. So I pay close attention, and note every detail.


From the beginning I knew my destination, and I chose my route accordingly. But am I working toward an extreme of joy, or of pain? Will I achieve a minimum, or a maximum?


These questions are in my mind when your father asks me, “Do you want to make a baby?” And I smile and answer, “Yes,” and I unwrap his arms around me, and we hold hands as we walk inside to make love, to make you.


Heptapod B가 외계인의 인류에 대한 “선물”이었다면, Louise Bank에게의 “선물”은 실은 그 무엇보다도 찬란했을 딸의 삶이었다. 그래서 제목이 Story of Your Life이지 Story of Heptapod B가 아닌 것이다. 현실과는 완벽히 동떨어진 이런 환상적인 장치 안에 한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희망을 담아낸 Chiang의 가치는 그만큼 더 특별해 보인다.




한편, 시간에 대한 “기억”이 주요한 장치로 사용되는, 잘 알려진 또 다른 작품이 있다. Cat’s Cradle 등의 초기 작품들을 통해 SF작가로 분류되기도 하는 Kurt Vonnegut의 Slaughterhouse Five이다. 이 소설의 골격을 담당하는 역사적인 사건은 2차 대전 막바지에 있었던 연합군의 Dresden폭격이다. Dresden의 도축장에서 포로로서 그 화마를 실제로 경험한 Vonnegut은 이 사건에 대하여 Billy Pilgrim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시간을 소재를 사용하는 장치의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Hebert보다 연관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Billy는 Dresden폭격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이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문장, “Listen: Billy Pilgrim has come unstuck in time” 에서 엿 보이 듯이, Dresden과 1960년대 현재 시점과 Tralfamadore이라는 행성에 납치되어 동물원에서 Montana Widlhack이라는 역시 납치된 여배우 함께 사는 미래의 시점이 다 뒤섞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이것이 기억인지, 실제 서로 다른 시간을 오가는 것인지는, 아니면 아예 정신분열증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Billy에게나 독자들에게나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편 Tralfamadore인들 역시 Heptapod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연속선을 한꺼번에 인지하는 4차원 존재들인데, 그래서 그들에겐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You sound to me as though you don't believe in free will,' said Billy Pilgrim.

'If I hadn't spent so much time studying Earthlings,' said the Tralfamadorian, 'I wouldn't have any idea what was meant by "free will." I've visited thirty-one inhabited planets in the universe, and I have studied reports on one hundred more. Only on Earth is there any talk of free will.'


먼 미래에 Tralfamadore 비행사 하나가 버튼 하나를 잘못 눌러 우주를 삭제해 버린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대화에서 Tralfamadore인들의 시간을 보는 관점이 잘 드러난다.


'How-how does the Universe end?' said Billy.

'We blow it up, experimenting with new fuels for our flying saucers. A Tralfamadorian test pilot presses a starter button, and the whole Universe disappears.' So it goes.

"If You know this," said Billy, 'isn't there some way you can prevent it? Can't you keep the pilot from pressing the button?'

'He has always pressed it, and he always will. We always let him and we always will let him. The moment is structured that way.'


Louise Bank나 Atreides가 “기억”하는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 본인의 의지를 구현했다면, Tralfamadore인들은 “미래 순응형”이다. 아니 어쩌면 이 말 자체가 의미가 없을 터이다. 순서대로 나열되는 경험이 아니라면 순응하고 어쩌고 할 것 자체가 없을 것이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일 것이다. 시간을 한꺼번에 인식하는 4차원의 존재가 실제로 있다면 아마 유일하게 말이 되는 태도가 아닐까?


어쩌면 Heptapod들이 실제로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Louise Bank가 말하듯이


Even though I’m proficient with Heptapod B, I know I don’t experience reality the way a heptapod does. My mind was cast in the mold of human, sequential languages, and no amount of immersion in an alien language can completely reshape it. My world-view is an amalgam of human and heptapod.


그래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3차원을 사는 인간으로서 태어난 그 오랜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Chiang과 Herbert의 이 두 작품을 읽다 보면 간혹 그 간접 경험만으로도 PTSD가 올 듯 여운이 남곤 하는데, 그 극적인 삶이 막상 내 것이 되었다면, 아마도 Billy Pilgrim이 100여 차례 추임새처럼 중얼거리는 “So it goes”가 내 유일한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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