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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Jun 20. 2018

빛은 "내비"가 아닌데...?

고전 역학이 양자 역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 전, Villeneuve라는 신예 감독의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를 보고, 그 원작 소설을 찾아 읽은 적이 있다. Ted Chiang의 Story of Your Life라는 단편 SF에 기초한 이 영화는 사실 이 원작 소설보다 훨씬 훌륭했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감독이 만든 Blade Runner 2049 역시 원작 Blade Runner보다 오히려 더 완벽한 영화였다고 생각되는데,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과 감각을 가진 감독인 듯 싶다.


한편 Ted Chiang의 원작 소설 자체도 조금 다른 이유로 나의 주의를 끌었는데, 그 안에 언급되는 한 가지 오래된 물리 이야기 때문이었다. 기묘한 양자 원리가 어떻게 조금 더 “상식적인” 거시 세계와 연결되는지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힌트가 여기에 있는데, 앞서 쓴 글에서의 약속을 지킬 기회가 될 것 같아, 이 SF소설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단편의 소재로 사용되는 물리적 사실은 공기와 물의 경계면에서 빛이 휘는, 비교적 잘 알려진 현상이다. 예를 들어 레이저 포이터를 물표면에 비추면, 통과하는 빛의 방향이 갑자기 꺾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풀장에 다리를 담그고 있으면, 물속의 다리가 꺾여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상을 계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빛이 대기 중의 P라는 지점에서 물속의 Q라는 지점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물과 같은 액체 속에서의 광속은 흔히 진공이나 대기 중의 광속보다 느린데, 따라서 전체 시간을 최소화하려면,  물 안에서 움직이는 거리를 줄여야 한다. 대기 중에서 조금 더 멀리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이고, 이렇게 하려면 경계면에서는 빛이 꺾일 수밖에 없다.


 

굴절율이 다른 두 매질 사이를 넘어갈 때 빛은 P와 Q사이에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 하도록 진행방향을 꺽는데, 이를 페르마의 원리라고 한다. (그림 출처: Wikipedia)


이렇게 빛의 진행을 계산하는 것을 편의상 "Least Time Principle"라고 해보자.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빛이 무슨 “내비”도 아닌데, P에서 Q로 가는 가장 시간이 짧게 걸리는 길을 선택한다는 말인가?




이 원리를 처음 제안한 것은 17세기 수학자 Fermat이다. 이야기는 빛이 직선으로 간다는 고대로부터의 생각에서 출발을 하는데, 직선은 물론 두 지점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길이다. 하지만 빛의 굴절 현상은 Fermat가 수학자로 활동한 17세기에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이 고대의 생각을 조금 고칠 필요가 있었고, 이에 그가 제안을 한 것이 최소의 저항이 있는 길을 찾아간다는 제안이었다. “빛에 작용하는 저항이 무슨 말이지?” 하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는 빛을 입자라고 생각한 뉴턴의 영향 아래에서 생각하면 크게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뉴턴의 시대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 중 하나가 보통 움직이는 물체에 작용하는 공기의 저항이 속도에 비례한다는 것인데, 저항에 반비례하는 소위 terminal velocity로 빛이 움직인다고 상정하면 Fermat의 위 주장은 빛의 진행이 가장 적은 시간을 쓰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빛이 공기와 물의 경계를 지나면서 방향을 꺾는 이유가 빛의 속도가 물속에서는 더 느리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는 셈이다. 17세기 당시에는 빛의 속도를 관측할 수 있는 직접적인 측정법이 없었으니, 물에서 더 느리게 간다는 주장 역시 당시에는 추측에 불과했다.


빛의 굴절 현상은, 오히려 그 이후 호이겐스 등에 의하여 제안된 빛의 파동설을 통해 비교적 명확히 설명되게 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아래와 같다. 빛의 파장 즉 골과 골 사이의 거리가 달라지면 이에 비례하여 빛의 진행 속도가 달라지는데, 물과 공기의 경계에 비스듬히 들어온 파동이 연속적으로 양쪽에서 연결되려면 아래 그림과 같이 진행 방향이 바뀔 수밖에 없고, 이것이 곧 굴절 현상의 근원인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에 약간의 수식을 더하면 Fermat의 최소 시간의 원리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까지 사칙연산 수준의 산수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빛의 굴절은, 따라서 Fermat의 원리는, 파동의 일반적인 성질을 통하여 가장 쉽게 설명된다.


사실 대학 수준에서 고전 역학을 배우는 물리학도들에게 이 현상은 매우 친숙하다. 빛의 궤적이 "최소한의 시간"이 걸리는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사실 “Least Action Principle”이라는 조금 더 일반적인 고전 역학의 원리와 닮아 있는데, "Time" 대신 "Action"이라는 조금 생소한 물리량이 관여되는 것 이외에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 고전 역학의 원리가 Fermat원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임을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물체가 P에서 Q로 움직일 때, "Action"이라는 물리량이 최소화(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최대화) 되는 궤적을 찾아 움직인다는 말이다. 물체들의 움직임이 도대체 왜 이런 원리에 맞추어져야 하는 것일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면서 "Action"이라는 양을 미리 계산하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닐터인데...

 



Ted Chiang은 이 현상을 "미래에 대한 예지"라는 문학적인 테마에 투영하여 위의 단편의 근간을 삼았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 녹아들어 있는 외계인의 언어”라는 특이한 소재이다. 그 근간에는 모든 사물이 미래를 인지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세상을 보는 관점의 문제 때문에 이를 구현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뉴턴의 운동 방정식은 철저히 그 순간 가해진 힘에 따라 궤적을 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묘하게도 그 근저에 있는 “Least Action Principle”은 그 궤적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동시에 고려하여야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인간의 언어를 전자에, 이 외계인의 언어를 후자에 대입하면 Chiang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외계인의 언어를 처음 접하는 주인공 (영화 Arrival)


물론 이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사실 Chiang은 소설가이긴 하지만 공학도였던 사람이고, 일반적인 공학자들에 비하여도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위 소설이 들어가 있는 단편집의 후기에서, 광학과 고전역학에서 보이는 이 현상이 사실 "예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우리 세상이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라는,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언급을 하고 있다. 위의 희한한 현상은 곧 우리의 세상이 양자 역학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오래된 힌트였던 것이데, 소설가 Chiang은 놀랍게도 이런 부분까지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양자 역학이 맞다면 모든 물질이 파동이라고, 앞서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는 빛과 물질이 근원적으로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빛이 조금 특별한 이유는 질량이 없는 특이한 종류의 녀석들이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빛은 항상 광속으로만 움직일 수 있고, 다른 물질에 비하여 "정지"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 조금 더 어려울 뿐이다. 이렇게 양자역학에서는 빛과 물질이 비슷한 것이라는 말 만으로도, 일단 왜 빛과 보통의 물체들이 움직이는 법칙에 동일한 종류의 원리가 존재하는지, 조금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이제 양자역학적인 입장에서 위의 "Least Action Principle"과 "Least Time Principle"을 이해해 보자. 사실 파동의 가장 대표적인 성질은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정말로 양자 역학적이라면 축구공에도 역시 파동의 성질이 있어야 할 텐데, 궤적을 그리면서 움직이는 축구공은 전혀 퍼져나가는 파동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괴리가, 양자역학이 전혀 상식적이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파동 역시 마치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파동의 또 다른 중요한 성질은 덧셈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두 파동의 마루와 마루 혹은 골과 골이 만나면 마루 혹은 골이 그만큼 깊어지지만, 골과 마루가 만나면 서로 상쇄하여 파동의 세기가 약해진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간섭현상 (Interference)"이라고 한다. 요즘 헤드폰 중에는, 그리고 일부 자동차 중에도 소위 "노이즈캔슬링(Noise Canceling)" 기능을 가진 녀석들이 있는데, 주변의 소음과 정확히 같은 소음을 인위적으로 만들되 골과 마루를 뒤집어서 만드는 것이 그 원리이다. 이미 있는 소음과 이 인위적으로 만든 소음이 정확히 반대의 모양으로 합쳐지면서 서로를 상쇄하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소리와 소리가 만나면서 더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전자를 상쇄간섭(Destructive Interference) 후자를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라고 한다.


두 군데에서 시작한 물결이 만나면서 간섭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Sybill Yates 제공, Shutterstock)


100대의 스피커를 잘 조율하여, 이들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합쳐지면서 대부분의 장소에서는 서로 상쇄되도록 고안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소리가 모든 곳에서 완벽히 없어질 수는 없다. 스피커를 구동하는데 들어간 에너지는 음파의 에너지로 바뀌었고, 이 음파의 에너지가 퍼져나갈 길은 있어야 하므로, 어딘가에는 소리가 전달되는 통로가 남아 있어야 한다. 소리가 상쇄된 곳이 많으면 많을 수록, 소리가 더해져서 증폭된 곳을 지나는 음파는 그만큼 더 강해질 것인데, 이렇게 강하게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난 장소를 따라 표시를 해보자. 아마도, 그 결과가 무언가의 궤적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양자 역학적으로는 파동임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물질들이 덩어리들로 보이는 현상의 근저에는 이러한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 있다. 어떤 물건이 P라는 장소에서 Q라는 장소로 가는 방법은, 일단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가 알려지면, 고전역학으로는 유일하지만 양자역학적으로는 무한히 많으며 그 각각은 파동의 형태로 퍼져나간다. 특히 양자 역학적인 파동은 모든 방향으로 그리고 무수한 많은 다른 파장이 섞여있는 모습으로 퍼져간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파동들이 공존하면 이들 사이에 간섭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공간의 어디에서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날까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양자 역학적으로는 어떤 입자가 어는 장소에 있을 확률이 해당 양자파동 함수의 크기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이야기를 이전 글에서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입자가 관측될 가능성이 높은 곳은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나는 곳일 것이다.


양자 역학이 고전 역학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이 부분이다. 계산을 보여주기는 어려우니 결론만 말하자면 이렇게 양자 물질파의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날 위치들과, 위에서 말한 "Least Action Principle"이 정해주는 궤적이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Action"이라는 양이 최대 혹은 최소가 되는 곳을 따라,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난다. 매우 특별한 궤적을 따라서만 보강간섭(Constru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나게 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본 고전적인 물리학자는 이 궤적을 따라 그 빛이나 입자가 움직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체의 궤적은 "Least Time" 혹은 "Least Action"에 해당하는 곳을 따라가게 되는데, 이는 미래를 미리 인지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없는, 그냥 파동의 "간섭"현상, 그리고 조금 더 근본적으로는 그 수학적 근원인 “삼각함수의 덧셈 법칙" 때문이다.  다만, 이 이야기 만으로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적인 물체가 특정한 궤적을 따라가는 거시적인 운동을 보이는 데에는 소위 Decoherence라는 추가적인 양자 현상도 역시 작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깊이 들어가는 것이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아 그냥 "그런 것이 있다더라"까지만 이야기 하자.

 



이런 이야기들이 원래의 질문, 즉 양자역학의 이상한 현상을 우리는 볼 수 없는지에 대한 완벽하게 충분한 설명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고, 어차피, 양자 역학은 커녕 “삼각함수”와 "덧셈 법칙"에서 이미 대부분의 독자들이 고등학교 때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을테니...


이 글은, 사실, 양자 역학을 처음 배우면서, 도대체 왜 슈뢰딩어는 그런 이상하고 뜬금없는 방정식을 만들었을까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물리학 전공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 그런 학생이 독자 중에 있다면, 고급 고전역학에 나오는 Hamilton-Jacobi 이론을 배워보도록 하자. 그러면 위에 있는 말이 정량적으로 이해될지도 모른다.


한편, 이 문장까지 읽고 있는,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극소수의 일반독자들에게는 사과와 함께 여기까지 버텨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의 주된 주장은 고전 역학이 어떻게 양자적인가 하는 이야기인데, 따라서 축구공같은 일상의 물체들 역시 양자 역학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다음의 몇 글에서는 이 주장을 조금 구체화해 조금 더 노력을 들여 다시 설명해 볼까 한다. 단순히 축구공이 왜 고전역학에 따라 움직이는 뿐만 아니라, 이런 일상의 물건들이 만들어지는 그 근저에 양자역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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