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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Jun 14. 2018

온 세상이 떨고 있다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태동: 양자역학


그 동안 쌓아오던 현대 물리학 이야기를 최근 두 권의 브런치북으로 발간했습니다. 맥스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상대성이론, 현대 우주론을 주로 다룬 "빛과 우주, 그리고 시간의 물리학"과 달리 여기서는 주로 양자 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거시세계에서 양자 물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흔히 보는 현대 물리 소개서들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들이 될 것 입니다.  (위 사진 속 인물들은 1927년도 5차 솔베이 학회에 모인 물리학자들입니다. 아인슈타인 이외에도 플랑크, 퀴리, 로렌츠, 보어, 디락, 슈뢰딩어, 하이젠버그 등등 양자 역학을 만들어낸 영웅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던 학회입니다.)   




맥스웰의 전자기론에 자극받은 아인슈타인 등이 상대성이론을 향해 달려가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양자역학이 만들어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양자역학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대성이론보다도 더 이상해 보이지만, 양자 원리는 이미 수많은 실험과 응용으로 검증된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원리이다.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은 주제이지만 일단 그 시초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해보자. 


19세기 말 경에 과학자들은 물질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시작하게 된다. 현대인이면 누구나 아는 "원자"라는 개념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지만, 이 작은 물체를 직접 "관측"하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가능해진 것이니, 19세기 과학자들의 경우 완전히 상상력에 의지하여 질문하고 추측하였을 것이다.


볼쯔만이라는 독일의 과학자가 있었는데,  열역학 혹은 통계물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열역학 혹은 통계 물리학이라고 하는 분야는 거시적인 시스템을, 예를 들어 질소가스로 가득 찬 풍선의 물리적 상태를, 하나하나의 입자를 따라다니기보다는 그 전체에 대한 물리량을 정의하고 이해하려는 물리학의 분야이다. 예를 들어 풍선의 온도나 압력의 상관관계, 주둥이를 열면 질소가스가 빠져나오면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등을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이다.


볼츠만 흉상과 열역학을 대표하는 물리량인 엔트로피의 정의.  (Martina Roell제공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


볼쯔만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질소 가스가 질소라는 알갱이들의 집합체라는 가설에서 시작하여 이들이 서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 평균적인 상태를 계산함으로써 이 풍선에 대한 거시적인 성질을 이해하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매우 당연한 접근인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당시의 독일 학계는 이런 원자론에 대하여 매우 냉담하였다.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해서, 이는 1906년 볼쯔만의 자살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인류가 물질의 근원에 대한 이해다운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최근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인데,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까지의 물리학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물질의 실체였다. 물질과 물질 사이에 어떤 힘이 있는지에 대한 이해는 조금씩 되어가고 있었지만, 예를 들어 만유인력은 벌써 수백 년간의 검증을 거쳤지만, 막상 그런 중력의 힘을 가지는 지구나 태양과 같은 천체를 구성하는 물질에 대하여는 어떤 미시적인 이해도 없었고, 사실 제대로 된 질문 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원자의 실체가 물리학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때가 바로 볼쯔만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데, 박막으로 편 금에 전자를 충돌시키는 러더포드의 실험을 그 시초로 볼 수 있다. 핵과 전자가 마치 태양계 태양과 행성처럼 서로의 인력에 의하여 묶여 원자를 구성하고 있다는 모델이 이 실험에 의해 제안된 것이 1911년이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양의 전하를 띄고 있는 부분이, 즉 지금 핵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원자의 크기에 비하여도 매우 작은 공간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규명하였고, 이미 태양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당시의 학자들에게 그 유사함이 아마도 쉽게 다가왔을 터이다. 그렇게 나온 것이 태양에 핵을 치환하고 전자가 행성의 역할을 하는, 러더포드의 원자 모델이다. 그러나 이 원자 모델에는 당시 이미 잘 알려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세대의 애용품이었을 라디오,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라는 두 제품의 공통점은 전자기파를 사용작동하는 것인데, 이런 전자기파는 원래 전자의 가속 운동에 기인한다. 전자와 같이 전하를 띄는 입자가 가속 운동을 하면, 즉 속도가 수시로 변하면, 이 입자로부터 전자기파가 나오는 원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과학자 맥스웰에 의하여 완성된 전자기학의 예측으로, 20세기 과학 문명의 초석이란 말이 부끄럽지 않은 엄청난 결과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러더포드 모델에서와 같이 핵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전자는 언제나 가속 운동을 하고 있어야한다는 점이다. 속도의 크기는 일정할 수 있으나, 그 방향이 계속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기파가 발생할 것인데, 전자기파의 발생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므로 어디선가는  만큼의 에너지가 추출되어야 한다. 물론 필요한 에너지의 근원을 전자기파를 만들어내는 전자일 것이고, 이는 전자의 역학적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태양계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성립되는데, 단지 전자기파를 중력파로 대치해야 할 뿐이다. 그러나 중력은 전자기력에 비하여 매우 작은 힘이기 때문에 태양 주변을 타원 운동을 하는 지구가 발산하는 중력파의 양이 매우 적고 따라서 이로 인해 지구가 손실하는 에너지는 우주의 나이와 같은 긴 시간을 감안해도 무시할 만한 것이다.


(다만, 블랙홀 주변에서 가속 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이 중력파가 무시 못할 양이 나올 수 있는데, 최근에 LIGO라는 실험팀에 의하여 관측된 중력파가 그 일례이다. 2015년 당시 관측된 이 중력파는, 두 개의 블랙홀이 서로의 중력에 의하여 묶여 돌다가, 중력파로 인한 에너지 손실로 인하여 점점 가까워져 결국 하나의 블랙홀로 융합되는 과정에서 발산된 것이었다. 이 실험은, 매우 이례적으로, 논문 발표 후 2년도 지나지 않은 2017년에 노벨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 실험이 꼬박 100년 만에 검증한 일반 상대성이론 자체는 노벨상을 못 받았다는 것 역시 특이한 사실이다.)


러더포드 원자에서 나와야 하는 전자기파의 경우, 그렇게 손실되는 에너지의 양이 매우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전자의 에너지 손실로 인하여 핵과 전자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므로, 애초부터 그런 원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매우 작은 핵이 있는 것은,  러더포드가 실험적으로 검증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전자가 그 주위를 태양계의 행성들처럼 돌고 있다는 이야기는 옳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어떠한 물리학도 전자가 핵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묶여 있는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는 1926년 슈뢰딩어 이론이 나오면서야 해결되었는데,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양자역학의 시작이다.

 



양자이론은 모든 물체가 파동이라고 이야기한다. 흔히 교과서들이나 입문서들에서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이라는 말로부터 양자이론을 설명하려는 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본질과 현상을 혼동하게 할 우려가 많다. 여기에서는 일단 무시하자.


러더포드의 원자 모델은 보어의 모델을 거쳐 슈뢰딩어의 그것에 안착하는데, 그가 제안하는 원자의 모습은, 핵의 양전하가 전자를 멀리 못 가게 묶어 놓은 상태에서 전자는 입자가 아닌 파동의 형태로, 조금 더 정확히는 "정상파"의 형태로, 핵의 주변에서 일정한 떨림을 하면서 곳곳에 퍼져있다는 것이다.


파동은 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물수제비가 만든 물결이 그러하고, 지진파가 그러하고, 초음속 비행기의 충격파가 그러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움직여 나가지 않고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파동도 있는데, 이를 정상파라고 한다. 기타의 여섯 줄 중 하나의 한가운데를 힘차게 튕기면, 양끝이 묶인 줄은 그 자리에서 좌우로 떨리는데, 대략 이런 파동을 정상파라고 한다. 실제로는 몇 가지의 정상파가 중첩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지만, 그렇게 자세하게 들어가지는 않도록 하자. 정상파의 가장 큰 특징은 파동의 떨림이 큰 곳과 떨림이 작은 곳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파동은 퍼져 있는 것이다. 기타 줄은 양쪽 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진동하고 있으므로, 기타 줄의 정상파는 기타 줄의 정확히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떨림이 큰 자리와 떨림이 작은 자리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핵 주변에 있는 전자라는 물질파 역시 정상파의 형태이므로 핵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그 떨림의 강하고 약함이 있을 뿐이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전자라는 물질파의 떨림이 강하면 강할수록 전자가 있을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어떤 장소에서의 그 떨리는 정도, 즉 진폭의 제곱과 전자가 그곳에 있을 확률이 정비례한다는 제안이다.


가장 간단한 수소 원자의 경우, 하나의 양성자로 이루어진 핵 주변 반경 약 1/10000000000 미터 정도의 공간에 전자가 정상파의 형태로 퍼져있다. 전자가 양성자에 더 끌려가 핵 안으로 소멸하지 않는 이유가, 가속 원운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파동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전자라는 물질파가 핵 가까이 더 작은 공간에 들어가려면, 파장이 짧아져야만 하고 그래서 오히려 운동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한데, 핵의 양전하가 전자의 음전하를 끌어당기는 인력 때문에 얻는 에너지로는 모자라다. 이 두 가지 에너지의 수지타산이 적당히 맞는 부피의 공간을 차지하는 정상파로서 전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수소원자 안의 전자. 네가지 다른 정상파에 대하여 확률 분포를 "관측"한 결과이다. (A.S. Stodolna et. al, Physical Review Letters, 2013)


전자들이 이렇게 정상파의 형태로 핵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가속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고, 따라서 전자기파로 에너지를 잃어버릴 일도 없으니, 이 슈뢰딩어의 원자들은 안정적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 물질도 사실은 파동이더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이 모두 "약간"의 수학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양자역학이나,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 상대성이론을 이렇게 일상의 언어를 통하여 처음으로 접하게 되면, 많은 경우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특히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를 철학적으로, 혹은 인간의 직관 안에서, 이해하고 재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서의 글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그러나, 자연은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그 직관이라는 것 자체가 인류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인데, 그 경험 안에는 물질도 원래 파동이라는 사실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 사이에 유명한 말 중에 "More Is Different"라는 표현이 있다. Philip Anderson이라는 고체물리학의 대가가 한 말이다. 어떤 물체 (예를 들어 원자 혹은 전자라고 하자) 한 두 개가 보이는 현상과, 그 물체가 많이 모여 있는 시스템이 보이는 현상은 서로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원래는 거시적인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을 입자물리처럼 근원적인 것을 연구하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인데, 원자를 이해하는 것과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이해하는 것 사이의 엄청나 간극이 있다는 말로서도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표현을 거꾸로 생각하면, 천문학적인 수의 원자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경험할 수 있는 현상들과 원자 하나하나가 겪는 현상들이 유사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물질파라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직접 인지할 수 있는 경험들과 소립자들의 그것이 다르기 때문이지, 양자 원리가 이상하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질이 모두 파동이라는 한 세기 전의 파격적인 이 제안은 이제 과학적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판명이 났다. 그렇다면, 이 양자 원리와 물질파에 대한 올바른 질문은 아마도, 도대체 왜 거시적인 물체들에게서는 이런 낯선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를 설명해보라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당연한 질문은 알고 보니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쩌면 양자 역학이 아직도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숙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냥 "More is different" 한 마디 던지고 무책임하게 구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작가는 그렇게 두꺼운 안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가능하면 다음 기회에 한 가지, 그나마 결코 쉽지 않겠으나, 힌트라도 남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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