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니던 시절, 업무에 한참 치이고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회사에 이직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로부터 매일 같이 업무 지시가 이어졌고 아직 일이 능숙하지 못했던 난 그들의 요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늦게까지 야근을 반복하며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냐면 야근을 하면서 내 책상 옆의 창문을 열고 8층 아래로 뛰어내려 그대로 삶을 마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상상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마음이 지치고 황폐했던 시기였다.
당시 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꿈꿨다. 아무도 만날 일이 없고, 아무런 연락도 없고, 누구도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 않는 하루. 그저 지루할 정도로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고요함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지워지는 하루. 그러한 하루하루가 이어져 한 주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더 간절했다.
오래전 이야기를 갑자기 꺼낸 이유는 그때 그렇게 원했던 하루하루가―조금 과장을 보태면―최근 나의 일상이 된 듯해서이다. 요즘 나의 평일은 매일 작업실에 가고, 가끔 체육관에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다. 저녁엔 보통 식사 후 집에 머무르며 커다란 빈백에 몸을 깊게 파묻고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근래엔 나에게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전화나 문자를 하는 사람도,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굉장히 잔잔한, 그리고 평온한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삶은 내가 한창 힘들었던 그때 꿈꾸던 삶이고, 무엇보다 퇴사 후 전업작가를 시작하면서 그렸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안온한 가운데 차분히 글쓰기에 매진하는 삶. 그토록 염원했던 상상이 현실이 되었으니 당연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야 할 터. 실제로도 난 요즘 나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거짓말이 아니다.
다만, 아주 가끔 나의 일상이 조금은 적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혼자서 바람이 불지 않는 깊은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 주변의 높게 솟은 나무는 미동도 없이 나를 완벽한 정적으로 둘러싸고, 표면에 작은 물결 하나 없는 연못은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세상이란 거대한 바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부지런히 굴러가고 있는데 나만 우두커니 멈추어 서서 바퀴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심지어 바퀴가 굴러가는 방향과 반대로 걸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평온한 하루.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흘러가는 삶. 그 차분하고도 편안한 흐름에 나를 그대로 맡기면 될 텐데, 어리석은 난 눈을 가늘게 뜨고 희미하고 불분명한 의심과 불안을 굳이 바라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이토록 만족스럽고 행복한 하루하루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해야 할 일, 쓰는 행위에 소홀하게 된다. 사실 부끄럽게도 신간이 출간된 이후로 지금까지 새로운 소설은 한 글자도 시작하지 못했다. 벌써 두 달이 되어 가는데 말이다. 무언가를 쓰기에 최상의 환경이 주어졌는데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니, 정말 바보 같다.
영화 <기생충>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기우(최우식)의 집에 방문한 민혁(박서준)이 집 앞에서 만난 인사불성의 취객에게 단호하게 소리치는 장면.
“정신 차려, 정신!”
영화의 맥락과 요즘 내 상태에는 전혀 연관이 없지만 이 대사는 요즘 내가 스스로에게 자주 외치는 소리이다. 조용하고 조금은 따분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괜히 불안해하며 이따금 집중력을 잃고 방향을 놓쳐버리는 나에게 하는 경고의 소리.
앞서 말한 것처럼 요즘 하루하루는 더없이 만족스럽다. 몸이 편하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 번 경험해 보아서 안다. 이전에도 가끔 찾아온 이렇게 평온한 나날은 정신 놓고 가만히 있으면 어느새 저 멀리 지나가 있곤 했다. 번잡하고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 다시 찾아오곤 했다. 그러니 나에게 찾아온 이 소중한 시간을 더 귀하게 여기고 나 자신에게, 내가 해야 할 일에 더 충실하고 집중해야만 한다. 불안과 의심에 현혹되지 말고 정신 차려야 한다.
비록 날씨는 끔찍이도 덥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 이 얼마나 글 쓰기 좋은 날들인가!
_2024.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