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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May 04. 2020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끈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를 들으며



오늘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나를 '응답하라, 전설의 무한궤도 씬'이라는 동영상으로 이끌었다.


2분 남짓한 그 짤막한 동영상의 내용은 사실 별 게 아니었다. 88년도 대학가요제의 마지막 참가자로 나온 무한궤도가 특유의 씬디사이저 전주가 흘러나오는 ‘그대에게’를 부르자마자 덕선이와 친구들 모두 그 팀의 우승을 예상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방영된 촌스러운 TV 자료화면과 신해철 아저씨의 앳된 모습은 매우 낯설었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아는 ‘그대에게’가 아닌가, 나는 나지막이 가사를 입으로 따라 불렀다.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리고 박자에 맞추어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응원 한 구절.

[ 최 ! 강 ! 7 ! 반 ! 승 ! 리 ! 한 ! 다 ! ]


엥. 갑자기 이게 왜 나오지.

그 여덟 글자는 15년 전, 고등학교 친구들과 음악에 맞춰 만든 체육대회 응원 구절이었다.

내 뇌도 참 신기하지, 어떻게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까.






2005년의 여름, 체육대회를 준비하던 우리 1학년 7반의 태도는 꽤 진지했다. 반티를 하나 만드는데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미술을 전공하던 친구는 며칠을 새 가며 캔버스에 용 그림을 그렸고, 우리는 티셔츠 뒷면에 빨간색으로 그것을 새기면서 그 옆으로 [절세미녀]라는 한자를 함께 쓰기도 했다. – 별 의미는 없었고, 어린 날의 한자를 잘 몰랐던 우리는 그게 좀 있어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


무더운 계절 안, 에어컨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달렸고, 던졌고, 당기고, 외치는 일들을 반복했다. 그것도 아주 있는 힘껏.


우리는 그렇게 체육대회 내내 우리 반만이 가지고 있는 열정과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하게도 1등이 아니었고, 그 날 오후 부상으로 주어진 노트와 펜 따위를 받으면서 우리 반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울었다.


열정만큼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열심히 연습한 노력에 비해 결과가 초라했다. 세상이 주는 그 작은 실패의 쓴 맛을 보며 우리는 정말 속상해했다.- 임용에 합격하고 갓 부임한 새내기 담임선생님이 한동안 교탁 앞에서 우리를 위로했던 게 생각난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회생활을 하고 나니 그 순간들이 조금은 꿈같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때는 누가보던지 맘 놓고 울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누가 볼까 쪽팔려 숨어서 눈물을 삼켜야 할 때가 많다.


그마저도 눈물이나 나오면 다행이게? 수많은 부침을 겪고 나니 이제 웬만한 것들은 장애물이라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느새 나는 무표정 너머에 수많은 감정들을 작은 방안에 마구 욱여넣고 방문을 잠가버리는 게 가장 쉬운 어른으로 성장해버렸다.


실패도 마찬가지다. 체육대회에서 1등을 하지 못한 건 차라리 솔직한 실패였다. 내가 못하고, 남들이 더 잘한 것이었으니 속상은 했으나 결과에 승복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등에게도 3등에게도 심지어 꼴등에게도 힘내라고 연필 한 자루라도 쥐어주는 아름다운 세상 아니었나.



그래서 나는 가끔, 아무것도 몰랐던 십 대의 순수한 실패와 순도 백 퍼센트의 눈물들이 그립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서,

사소한 오해가 켜켜이 쌓여서,

지독히 노력해도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아니라 잘 돼봤자 14K 목걸이 줄 정도밖에 안된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는 날이 와서 흘린 눈물들과 느끼게 된 낙담들 모두는 사회의 때가 조금은 섞인 것들이었다.


승리한다고 응원만 하면 정말 승리가 내 곁에 올 줄 알았던 어린 날들과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날들은 이미 지나가고 없지만 나 역시 그런 순수한 날들이 있었다는 잠깐의 기억이 들어 오늘 하루도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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