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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Apr 22. 2020

겨우 관광지나 정복하려고  여행을 왔단말인가




회사에 퇴사를 통보한 그 날, 나는 지친 순례자가 알베르게를 찾는 심정으로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그것은 오는 날이 정해지지 않은 편도 티켓이었고, 최소 한 달 이상을 머물 생각으로 서울을 떠났다. 그때의 나는 오 년이나 쉼 없이 달린 이 사회의 치타 중 하나였으며, 휴식에 꽤나 목말라있었다.


여행의 첫 날, 내가 제주도에서 머물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제주도 관광 리스트 만들기’였다. 그것은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었다. 테이블 위로 낯선 제주의 지도를 펼치며 형광펜을 긋고 가장 효율적인 여행 동선을 조사했다.


또, 인스타니 블로그니 일일이 뒤져가며 맛집을 검색하기도 했다. 나의 시간은, 나의 여행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5년간 축적한 나의 엑셀 실력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깔끔한 보고서의 형태를 띤 자료는 한눈에 보기에도 꽤나 괜찮았고,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에게 선심 쓰듯 이 정보를 공유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행이 시작된 지 딱 2주가 되던 어느 날, 나는 ‘이 짓’을 그만두게 된다.






그 날은 단 세명만이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른 날이었고, 각자 나름대로의 하루 여행을 마친 게스트들은 저녁이 되자 슬슬 공용공간으로 모여들었다.


오늘의 손님은 삼십 대의 나와 S언니, 그리고 스물한 살의 청년 W였고 그들은 모두 직장인이었다.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하다 곧바로 캔맥주를 땄다. 처음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지만 빈 맥주캔이 늘어날수록 분위기는 풀어지기 시작했다. S언니가 어린 직장인 W의 여정을 물은 건 그즈음이었다.


“오늘은 어디를 갔어요?”

“협재랑 애월이요. 버스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S언니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각은 같아 보였고, 먼저 입을 연건 S언니였다.


“차 없이 여행하는 건 시간낭비야. 버스로 못 가는 핫플레이스도 얼마나 많은데! 당장 렌트해!”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W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였으나 이내 도리질을 했다.


“운전이 미숙하기도 하고, 버스로 돌아다니는 것도 재밌더라구요. 물론 좀 많이 걸어야 하기는 하지만요.”


그의 말이 끝나자 S언니와 나는 깔깔 웃으며 역시 어린 게 좋지요, 우린 이제 무릎이 아파, 라는 늙은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겨우 삽십언저리밖에 안된 주제에 말이다.



대화는 곧 일상적인 이야기로 넘어갔고 빈 맥주캔은 더욱 늘어갔다. W가 우리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건 그때였다.


“병역특례로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사실 뭐…, 군대를 대신해서 하는 거라 좋기는 하지만 저는 대학을 못 나왔다는 게 좀…. 대학을 갔어야 했나….”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선은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는 자신의 손가락에 처연히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그가 어떤 결핍과 조급증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가령, 회사 안에서 느끼는 대졸자와 자신 사이의 낙차라든가 또래 친구들이 당연히 누리고 있는 캠퍼스의 낭만에 대한 부러움이랄까.


그의 고민에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기 위해 한참을 더듬거렸다. 위로를 해야 하나, 아니다. 대학을 나오고 사회생활 6년 차에 접어든 내가 위로랍시고 던진 말들이 그에게 진짜 위로가 될까? 속으로 당신이 뭘 아냐며, 힐난하지 않을까.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 너는 너 나름의 속도가 있다느니 각자의 삶의 방식이 다 다르다느니 뭐 그런 에세이에나 나올법한 멋있는 말들을 해줘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부 다 무용한 말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맥주를 한방에 원샷을 때린 S언니가 테이블 위로 캔을 큰소리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 고민해?! 대학 안 가는 게 더 좋아! 남들보다 커리어도 빨리 쌓고, 아마 승진도 빠를걸? 돈도 더 많이 모일 거야. 군대도 안 간다며? 훨씬 효율적이지 뭐!”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청약을 들고 돈을 모아 집을 사는 게 최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W는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은채 의미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동조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나는 이상하게 그녀가 문제를 앞에 두고 어떻게 풀지 고민하는 자식에게 그저 정해진 답을 들이대는 부모처럼 보였다.






어느새 밤 열한 시. 술자리는 끝났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다 책상 위에 놓인 ‘반드시 가야 할 관광 리스트’를 발견하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에게 이것을 전해주어야 했지만 글쎄, 그 날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 자료들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도에는 나름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동선들이 형광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으며 상념에 잠겼다. 우리가 그에게 단정하듯 내던진 말들도 떠올랐다.


[차 없이 여행하는 건 시간낭비야. 버스로 못 가는 핫플레이스도 얼마나 많은데! 당장 렌트해!]


그녀가 W에게 말한 것들까지도.


[뭘 고민해?! 대학 안 가는 게 더 좋아! 남들보다 커리어도 빨리 쌓고, 아마 승진도 빠를걸? 돈도 더 많이 모일 거야. 군대도 안 간다며? 훨씬 효율적이지 뭐!]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길들을 정말 빠르게 가면 좋은 걸까.

그처럼 버스에 앉아 그 주위를 돌고 돈다면 그건 우둔한 걸까.

그래도 이 길이 맞는 건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꽤 괜찮은 것 아닐까.


손가락 끝은 지도 위 표시된 핫플레이스들에 멈추어 섰다.

문득, 나는 내가 여행자인지, 아니면 이 곳들을 빠르게 정복하러 온 치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전자는 아닌 듯 보였다. 곧, 오색빛깔의 현란한 지도 위로 나의 과거가 끼얹듯 겹쳐졌다.


회사를 다니는 5년 동안 나는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목표를 설정하고 효율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집중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나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남는 건 내가 아닌 폴더 속 엑셀 파일이었다. 그건 나를 갈아 넣은 최종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게 싫어 떠나온 곳에서조차 또 목표만 향해 달리고만 있다니…. 대체 무엇을 위해 그랬던 걸까. 여행이란, 우리의 삶이란, 효율을 따지며 정복하는 결과물이 아닌데.


버스를 타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좋고, 차를 몰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오면 잠시 내려도 좋다는 걸 왜 몰랐던 걸까.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라 이 길에 무엇이 있는지, 지금의 나는 슬픈지, 기쁜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고민해보는 것이라는 걸 왜 그동안 몰랐던 걸까.


나는 책상 위의 지도와 리스트를 쓰레기통에 넣으며 생각했다.

그래, 앞으로는 그렇게 살자. 치타도 산책은 필요한 법이니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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