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침대에 앉아 소설책을 보고 있던 나는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진동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브런치 (글쓰기 플랫폼) 알림. 그저께 올린 글 하나가 조회수 이십만을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화면을 수초 간 주시했고 이내 양입술을 이 사이로 말아 넣었다. 내 글이 주목받았다는 사실을 당연히 좋아해야 마땅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들이 불쑥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 나는 핸드폰을 끄고 다시 소설책을 들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에휴, 책을 덮고 그대로 헤드레스트에 몸을 푹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생각하기 싫은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며칠 전, ‘우리 부부는 저녁을 사 먹습니다’.라는 글을 인터넷에 업로드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고, 결혼 후 사회에서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을 은근히 강요당하는 ‘나’의 마음과 이에 대한 남편의 생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중을 담은 내용이었다. 고맙게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음과 브런치 메인에도 올라간 탓에 순식간에 조회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잔디인형처럼 쑥쑥 올라가는 조회수 알림이 연속적으로 울리자 꽤나 얼떨떨했지만 기분은 마냥 좋기만 했다. 물론 댓글을 확인하기 전까지 말이다.
조회수가 십만이 건 이십만이 건 하늘을 떠다니던 기분이 지하암반수가 되어 철철 흘러내리는 건 삽시간이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써 내려간 댓글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내용에 들어간 어떤 발언에 대해서 자신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의견을 내주었지만, 어떤 이들은 ‘읽다 보니 기분 나쁘네, 이런 글을 왜 쓰냐, 생각 좀 하고 글을 써라’라며 일방적으로 감정 섞인 짜증을 내는 비난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비판은 수용할 수 있었지만 뾰족한 날로 턱밑을 찌르려 하는 비난은 좀처럼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괴롭혔던 건 이런 류의 댓글이었다. ‘오빠’라고 부르는 우리 부부의 호칭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 어떤 독자는 혹시 우리 사이가 근친상간이냐는 모욕적인 말을 내뱉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어떤 이는 가타부타 어떤 설명도 없이 ‘어쨌든 그게 정상은 아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뭐가 어떻게 정상이 아닌지는 말이나 해주고 가지, 처참하고 억울했다. 욕받이도 아닌데 왜 내 시간을 공들여 소진하면서 글을 쓰고 십원 한 푼도 못 벌어가며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초록창에 ‘악플’을 검색하다가 끄기를 반복했고, 내 글을 메인에 올려주신 고마운 브런치 관계자분을 아주 잠깐 원망했으며, 행여 남편이 이 글과 댓글을 보고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이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브런치의 알림은 계속 울렸다. 에이씨, 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돌려놓았다.
며칠 뒤,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기분은 며칠 째 제자리였고 그동안 댓글 몇 개는 계속 내 머리를 떠다니고 있었다.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공백의 워드 파일을 열었지만 글쎄, 문장은 마침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렇게 날들은 더욱 무의미해져만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케줄은 스케줄이었다. 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트레이너의 지시 아래 수많은 동작들을 반복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예전부터 해오던 동작들에 이어 새로운 동작들을 배웠다. 개 중에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동작들이 수월하게 잘 되기 시작해서 기쁜 마음이 드는 것도 있었고, 마음과 달리 끝까지 안 되는 동작도 있어 답답함이 드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자세에 집중하며 몸을 움직이니 며칠간 나를 괴롭혔던 댓글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여러모로 운동은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도움이 되고 있었다. 운동이 끝난 후, 나는 트레이너에게 잘 안 되는 자세에 대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강사님, 저는 가르쳐주신 자세가 너무 안돼서 속상해요. 그래서 계속 이게 왜 이럴까 고민하는데 그래도 답이 안 나와요. 왜 그럴까요. 저도 잘하고 싶은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내 표정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트레이너가 입을 열었다.
속상하세요?
네. 너무요.
회원님. 사람마다 안 되는 자세가 있어요. 반면에 다른 사람들보다 회원님이 잘하는 자세가 있으시고요. 그건 왜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지않으시죠? 아마도 더 잘하고 싶어서 그러신 거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뭐냐면요, 마인드예요. ‘속상하다, 왜 이럴까.’ 이런 마음을 안고 하시다보면요, 더 집중이 안되고 흐트러진다구요. 속상한 마음은 계속 잡고 있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바로 털어버리시고 거울을 보세요. 그리고 자세에 집중을 하세요. 그러면 어느샌가 회원님도 모르게 되어있을 겁니다.
속상한 마음은 계속 잡고 있기보다 그 자리에서 바로 털어버리시고 거울을 보라…. 나는 그의 말을 입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내 등에 커다란 날개를 달아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내가 한 질문은 운동에 대한 것이었고,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을 성실하게 해 주었을 뿐인데 이상한 지점에서 깨달음이 온 것이다. 동시에 며칠 동안 댓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심하게 풀이 죽어있던 스스로를 떠올렸다. 뭐야, 별거 아니잖아. 나는 참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그걸 보고 있는 트레이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너무나 큰 조언을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설 뿐이었다.
헬스장에서 나오는 길, 핸드폰을 꺼냈다. 오랜만에 들어간 브런치에는 여전히 수많은 알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최근의 글을 클릭했다. 조회수는 이십여만이 훌쩍 넘은 상태, 좋아요는 160개, 구독자 수도 크게 늘어있었다. 나는 그 숫자들을 빤히 바라보다 화면을 아래로 내려 그동안 겁이나 열지 못한 댓글창을 흝어보았다. 여전히 불편한 댓글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수많은 응원의 글, 동조의 글, 선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사이 어떤 독자들은 무례한 댓글러들에게 나 대신 일침을 가해 주기도 했다.
아이고, 은주야. 너는 며칠 동안 대체 무엇을 한 거니. 그렇다. 그동안 나는 나를 향해 야유를 하며 비난을 퍼붓는 몇몇의 사람들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애써서 찾아다니고 기억하고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 주위 장미꽃을 들고 나를 찾아와 준 수많은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나, 어떡하긴 뭘 어떡해.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글만 쓰면 될 일이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다. 아주 맑다. 오늘도 내일도 늘 맑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