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주 Jan 15. 2020

우리 부부는 저녁을 사 먹습니다.

결혼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은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저녁은 어떻게 준비하냐는 것이었다.


비슷한 질문으로는 ‘반찬은 무엇을 해 먹고 사니.’, ‘남편 밥은 해주고 사니.’ 등이 있었다. 신기했다. 싱글일 때만 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관심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남의 집 저녁 식탁에 무엇이 올라오는지까지 궁금해하니 말이다.


신혼 초에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저희는 맞벌이라서 저녁에 만나 동네 주변에서 사 먹고 들어가요. 그러나 정확히 두 달 후, 나는 동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솔직하고도 순진한 대답이 때로는 피곤한 오지랖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훈련소에 입소한 지 며칠 되지 않는 신병과 같은 마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비역이랍시고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군인이 돼서 경례도 똑바로 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누가 정해놓은 건지 모르는 의무를 수행해야 했던 나는 때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상사와의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네, 해 먹어요. 오늘은 무슨 메뉴를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네요,라고. 


그동안 내가 느낀 오지랖은 예컨대 이런 것들이었다. 그래도 남편은 남편인데 밥은 아내가 챙겨주어야 하지 않니 (어느 40대 여부장) 저녁은 그렇다 치고 아침도 혹시 챙겨주지 않는 것이냐, 남자가 집에서 그렇게 밥도 못 얻어먹고 다니면 일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30대 최대리), 그런 것을 시댁에서 알고 있냐(30대 김대리)는 이야기까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점심 후 카페에서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더 가관이었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대강 준비하고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린 후에서야 본인의 출근을 준비한다는 최대리의 이야기에서부터 함께 사는 시댁 식구와 저녁을 넘어 매일 야식 파티를 하는 탓에 그 준비를 하느라 머리와 몸에 이골이 날 것 같다는 김대리의 웃픈 결말들이 다량 함유된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와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막이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와이셔츠는 남편분 것 아닌가요? 똑같이 일하는데 왜 대리님이 다리시나요? 일을 마치고 온 이에게 저녁 준비에 이어 야식 준비까지 시키는 건 아니지 않나요? 공감하지 못하는 소재의 홍수 속에서 방황하며 순진히 묻는 나 같은 쪼랩에게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세상을 다 산 사람들처럼 말했다. 아직 신혼 초라 그렇지, 뭐! 이대리도 조만간 이해할 거야!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기혼자인데도 다른 구석이 많은 것 같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내가 좀 별난종인가 싶기도 했다. 한창 결혼 준비할 때 친정엄마가 당신에게서 요리를 배우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의 이유 역시 남편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호기롭게 ‘요즘 인터넷에 레시피 다 있거든? 그리고 같이 돈 버는 처지니 일찍 오는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다.’라는 말을 뱉어냈었다. 엄마는 하이고, 하며 혀를 찼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나조차도 같은 세대들의 활동이 넘쳐나는 인스타그램을 볼 때면 스스로를 철저히 이상한 사람으로 분리하곤 했다. 갓 결혼한 친구들은 남편을 위한 식탁이라며 #신혼스타그램 #7첩반상 #9첩반상과 같은 해시태그를 걸어 게시물을 올리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아기자기하고 괜찮은 신혼을 보내서 친구가 부럽다는 마음보다는 남편에게 이렇게 해주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정말 그 누구의 말처럼 내 남편은 나 때문에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초록창에 검색어를 입력했다.


‘괜찮은 저녁 메뉴 레시피’




퇴근 후의 식탁은 오랜만에 제기능을 찾았다.  오랜만에 끓인 된장찌개와 흰쌀밥, 계란 프라이, 그리고 반찬가게에서 급하게 사온 몇 가지 찬이 조화를 이루었다. 솔직히 나는 요리를 하는 내내 뭔가에 떠밀려 억지로 한 것 같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작 식탁에 정갈하게 놓인 접시들을 보고 있으니 무언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다들 이 순간을 기념하던데 나도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스쳐 핸드폰을 꺼내 인스타용 사진도 찍어놓았다. 묘한 느낌들의 향연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남편도 좋아할 것 같았고, 좋아해 주었으면 했다.


마침내 남편이 도착했다. 오자마자 그의 손목을 이끌어 식탁으로 안내했다. 투박하긴 하지만 노력의 흔적들이 가득한 식탁을 보며 그는 웬일이냐며 감탄을 금치 못했고, 수고했다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외투를 벗고 앉아 밥을 와구와구 떠먹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본 나는 어느새 엄마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느꼈던 찜찜함은 나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렇게 잘 먹어주니 밥상 차리길 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은 이걸 정말 네가 한 거냐고, 맛있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나는 먹다 말고 찬이 담긴 접시들을 남편 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오빠, 많이 먹어.

너도 먹어.


남편은 먹다 말고 내가 자신 쪽으로 밀어 넣은 그 접시를 힐끗 보더니 다시 내쪽으로 밀며 대답했다. 나는 넌지시 물었다.


오빠, 내가 계속 이렇게 퇴근하고 밥 차려줄까?


남편은 젓가락으로 햄을 집어 입안으로 쏙 넣고는 우물우물 씹은채로 대충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하지 마.


엥. 나는 혹시나 오늘 한 밥이 맛이 없었나 싶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왜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물음이 나왔다.


네가 우리 엄마야?

응?

네가 우리 엄마냐고.

아니, 엄마는 아니지.

그래, 나는 엄마가 아니라 아내랑 결혼한 거야. 엄마가 날 보살펴 준 것처럼 너가 날 보살펴줄 필요는 없어. 내가 애도 아니고. 그리고 너도 일하고 와서 힘들잖아. 그냥 지금처럼 사 먹자.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말이야. 그래, 뭐 정…. 집밥 먹고 싶을 때는 차리고 싶은 사람이 차리면 좋은데 뒷정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거야. 괜찮지?



하.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몇 달간 해왔던 수많은 의무감과 부채의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들은 다 헛수고였을까. 하지만 그의 말이 맞다. 나는 그의 엄마가 아니라 아내였다. 내가 그와 결혼을 한 이유는 성격도 농담 코드도 너무나 잘 맞았기에 같이 살면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단지 그것뿐, 애초부터 그가 저녁을 못 먹을까 봐 챙겨주기 위해 살고자 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난 왜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그의 엄마의 옷을 입으려고 했던 걸까.


그 누구의 말처럼 아직 우리는 신혼이다. 아이도, 무례한 시댁도 없다. 그래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아내와 남편의 역할이 무엇인 건지 모르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 부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우리는 스트레스가 넘쳐나는 각자의 일터에서 8시간을 보내며 오늘 저녁은 또 무엇을 만들어야 하나라는 또 다른 고민에 직면하는 것보다 오늘은 어떤 맛집을 가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을까, 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든, 어떻게 살든, 우리 부부는 아직 이런 식으로 살고 싶다.


어쩌면 나를 미숙의 존재로 만드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 수많은 오지랖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좀 더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 보자고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던진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이대리입니다. 독자님들의 댓글을 보다가 글에서 오해할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 같아서 수정을 하였습니다. 해당부분은 한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가족을 구성하는 어른들은 양육의 측면에서 그 아이를 바라보고 챙겨주는 것이라는 의도에서 쓴 것이며,  가족의 누군가가 어떠한 역할로 고정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삶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지적해주신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니 서로  싸우지 마세요 ㅠ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