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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라기 고시원의 썩은 고구마 케이크

한 팀만 15년 응원한 팬의 이야기,《랩터스》(해준, 가익가)

공부하지 않았으니 편입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휴학 기한이 만료되어 자퇴해야 했기에 돌아갈 학교마저 사라졌다. 편입 학원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술잔을 비우는 아버지 모습만 보였다.


    랩터스는 무기력한 내가 응원하는 팀답게 지고 또 졌다. 2004년에 팀을 처음 맡아 33승을 거둔 샘 미첼 감독은 다음 시즌에 27승 55패라는 퇴보한 성적으로 NBA 최악의 감독으로 꼽혔다. 미첼 감독이 카터와 불화로도 모자라 새로운 리더 보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나는 절망스럽지 않았다. 연장전을 열 번 갔으나 한 번밖에 이기지 못한 뒷심부족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랩터스처럼 나도 도전해 보았자 실패하리라 믿었고, 그들의 패배가 이를 증명하는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음울한 집안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 부모님에게 고시원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나는 일반인이 출입 가능한 대학 도서관 근처에 방을 구했다. 하지만 도서관에 가거나 공부하지 않았다. 고시원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아서 편안했다. 그러나 자유는 점점 방종이 되어 나 자신을 갉아먹었다. 일주일 내내 고시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컴퓨터 게임과 텔레비전 시청으로 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 공황 상태에서 내 손이 내 목으로 향하려 할 때,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상담 선생님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상담 선생님을 처음 찾아간 이유는 내 짝꿍 때문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치아가 고르지 않던 내 짝꿍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대응하지 않고 웃으며 넘기는 짝꿍에게 동정심이 생겼고 내가 말동무하면서 우리는 친해졌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물려받은 짝꿍에 나는 동병상련을 느꼈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친구 이야기를 듣다가 우울증에 빠져 상담실을 찾아갔다.


   개량 한복 차림에 풍채가 좋고 저음의 목소리를 지닌 상담 선생님은 인자해 보였다. 위로나 격려의 말 대신 선생님은 냉정하게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질문을 이어갔다. 응어리진 감정을 꺼내는 자체만으로도 괴로웠지만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배운 자체로도 도움이 되었다. 그때부터 짝꿍과 거리를 두었고 마음을 다스렸다. 석 달간의 짧은 상담이었지만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고등학교 때 내 삶은 끝났을지도 모른다.


   1년 뒤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을 들고 상담실에 찾아갔는데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상담 전문가가 되려고 선생님이 얼마 전 퇴직했다고 했다. 도전하는 선생님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몇 년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며 나를 보고 환히 웃었다. 그리고는 퇴직 후 상담소를 차렸다며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고시원 방에 갇힌 채 죽음을 떠올린 순간, 상담소를 개설했다는 선생님의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쳤던 것이다.


고시원에서 누구도 간섭하지 않아서 편안했지만 자유는 점점 방종이 되어 나 자신을 갉아먹었다 (출처: gosiwonhome.com)


   인터넷에서 선생님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상담소 홈페이지가 나왔다. 전화기를 들고 내리길 여러 번,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급작스러운 연락에도 선생님은 반가워했다. 부부 상담뿐 아니라 흉악범 피해자 가족을 상담하는 저명한 상담가가 된 선생님은 바쁜 일정 때문에 나에게 다른 상담 선생님을 소개해주었고, 대학생이 감당할 만큼 상담 비용을 책정해주었다.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차분한 목소리의 상담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상담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겁이 났고 조금이라도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웠다. 선생님은 내가 마음속 ‘또 다른 나’에게 다가가도록 기다려주었다. 몇 주 뒤 마음 깊이 웅크려있는 어린 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아픔이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90분의 상담 시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말을 무조건 따르며 살 수밖에 없었던 나의 과거를 이해하니 성난 마음이 풀렸다. 상담을 끝내고 나오면 세상이 평화로워 보였고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사라진 듯 몸이 가벼웠다. 그때부터 상담하는 수요일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고시원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창문이 하나 있고 침대, 텔레비전, 컴퓨터가 전부인 방은 엉망진창이었고 며칠 밤을 새워가며 NBA 농구 게임에서 랩터스를 우승시키는 것이 내 일상의 전부였다. 한 달 뒤 나는 저장해 놓은 게임 데이터를 삭제해버렸다. 가짜 랩터스가 열 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할 때 현실 속 진짜 랩터스는 1승 15패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11월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악의 시즌으로 남은 2005-06시즌 랩터스 미디어 가이드북


   한번은 대학 힙합 동아리를 같이하던 친구가 내 생일을 축하한다고 고시원 근처로 찾아왔다. 술을 늦게까지 마시는 바람에 지하철이 끊겨 친구와 고시원 방으로 들어왔다. 전날 받은 고구마 케이크가 남아 있길래 친구에게 먹으라고 했고 케이크를 입에 넣자마자 친구는 “웩”하면서 뱉어버렸다. 알고 보니 썩은 케이크였다. 빈 페트병이 나뒹굴고 휴지통에는 쓰레기가 넘쳐나며 밥풀이 말라 비틀어있는 그릇에 썩은 고구마 케이크까지. 온갖 잡동사니를 헤치고 누우니 내가 쓰레기인지 쓰레기가 나인지 모를 정도였다. 쓰레기 수풀 속 고시원 방에서 내가 화석이 되어갔으니, 과연 그곳은 ‘쥬라기 고시원’이었다.


   쥬라기 고시원에서 인생의 바닥을 찍었다고 여겼지만, 돌이켜보니 그곳은 편입이라는 의무감으로 숨 막히기 직전의 나 자신을 처음으로 풀어놓은 장소였다. 온종일 멍을 때리고 질릴 때까지 게임을 하고 마음껏 드러누우며 쥬라기 고시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해보았기에 삶에 여유가 생겼다. 그 덕분에 프리랜서의 삶을 택했고, 언젠가 내 안에서 나올 무언가를 세상에 드러낼 기회를 엿보면서 조용히 글 쓸 힘을 얻었다. 썩은 고구마 케이크와 쥬라기 고시원으로 상징하는 2005년은 인생 최악의 해였지만, 세상으로부터 나를 감추면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한 최초의 시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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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터스》 입고처


<서울·경기>

책방비엥 (은평구) | 온라인 오프라인

다시서점 (강서구) | 온라인 오프라인

올오어낫싱 (금천구) | 온라인 오프라인

프루스트의 서재 (성동구) | 온라인 오프라인

무엇보다, 책방 (송파구) | 온라인 오프라인

커넥티드 북스토어 (종로구) | 온라인 오프라인

이후북스 (마포구) | 온라인 오프라인

인덱스 (광진구) | 오프라인

스토리지필름앤북스 해방촌 (용산구) | 오프라인

이문일공칠 (동대문구) | 오프라인

서로의공간 (경기 구리시) | 오프라인


<부산>

*나락서점 (부산 남구) | 온라인 오프라인

*주책공사 (부산 중구) | 오프라인

  

<전북>

에이커북스토어 (전주 완산구) | 온라인 오프라인

조용한흥분색 (군산 미원동) | 오프라인

   

<전남>

책방심다 (순천 조곡동)  | 오프라인


<대구·경북>

*고스트북스 (대구 중구) | 온라인 오프라인

*책봄 (구미 원평동) | 온라인 오프라인


<대전>

*해윰책방 (대전 서구) | 오프라인


<강원>

*깨북 (강릉 교동) | 오프라인

*느림의 미학 (원주 단구동) | 오프라인 (12월 15일부터 구매가능)


<제주>

*어떤바람 (서귀포 안덕 사계리) | 오프라인


<이동서점>

*북다마스 | 온라인 오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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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고 서점 추후 업데이트 예정



※ <랩터스> 중 '형! 랩터스가 결국 해냈어' 부분을 저자 낭독 영상으로 제작하여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해준 목소리로 생생하게 듣는 랩터스 우승의 순간! 아래 링크로 들어가 확인해보세요.


[낭독] 저자 해준 목소리로 듣는 《랩터스》- '형! 랩터스가 결국 해냈어'

https://youtu.be/BjBx-gl2q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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