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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Dec 31. 2019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여행에서의 만남은 특별하게 강렬하다 - 제주 여행기 2 그리고 P

여행이 내게 주는 감정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여행자의 하루는 일상에서의 한 달과 같다고 말할 만큼 시간과 감정의 농도가 짙은 시간 속에서 타인은 나와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하고, 때론 감정이 상하기도 하며, 혹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도 만든다.

이건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자 실은 이번 여행의 말미에 나를 가장 강렬하게 흔든 사람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1.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가장 낮은 곳에 있을 것이라는 독립서점, 밤수지 맨드라미라는 책방이 우도에 있었다.

우도에서 독립서점이라니! 대체 이걸 운영하는 건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과 책덕의 기질이 더해져 한참을 구경하다가, 가끔 내 브런치에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작가님의 책을 발견했다. (독립서점이지만 여러 도서와 소품, 제품을 취급한다)


우도에서 나는 유독 감정적으로 힘들 때라 집어 들게 된 책을 펴 보니 오잉?! 대미녀의 기질이 풍기는 바로 그분! '요술램프 예미'라는 필명을 쓰시는 조우관 작가님의 책이었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만 봐도 풍겨지는 프로페셔널 한 이 분의 전작인 '엄마 말고 나로 살기'의 책 제목이 믿기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이런 분이 엄마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나의 이런 글이 단순히 타인에 대한 외모 평가로 오해받지 않길 바란다. 그저 이 작가님의 글을 봐 왔기에, 거기 더해져 보게 된 사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감정을 넘어선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라는 리스트에 더해지는 분이었다. 실제 만남은 아니었으나 지인을 만난 듯 반가웠다.


2.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

에어비앤비를 통해 알게 된 호스트가 이제 곧 닫게 될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지막 연말 파티를 연다는 초대장에 무작정 떠난 제주행이었다. 내게 다소 충격이었던 건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 '제주에 내려온 지 N연차입니다'라고 소개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여행자는 나와 일행뿐이었다) 나보다 한참은 어릴 것 같은 친구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제주살이의 환상과 현실에 대해 말하며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다가가고자 애쓰는 모습은 내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일행은 충격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이 하룻밤 이렇게 모여 즐거운 파티를 하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고 했다. 모난 사람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연태고량, 보드카, 와인, 맥주.. 엄청난 술을 다들 그렇게나 마셨건만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즐겁게 떠들고 웃기만 했던 유쾌한 파티였다.

나 역시 일행과 같은 마음이었다. 각자 다른 나이대의 사람들이 그저 '제주'라는 관심사 하나에 이렇게 모여 이렇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날 수백 장의 사진이 찍혔고 공유됐으나 프라이버시를 위해 올릴 수 없는 슬픔..ㅜㅜ) '쓸모없는 선물 교환하기'가 있었는데 그건 정말 잊을 수 없는 게임이었다. (이건 다음 편에 자세히)


3. 나의 여행 메이트 A

올해 제주를 두 번 간 건 이번 여행을 함께해준 일행의 결심 덕분이었다.

우리는 발리 옆 길리섬에서 만났고, 여러 한국인들이 모인 그룹 중 둘만 여자였는데 말이 꽤나 잘 통했고, 한국에 와서도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근처 사는 친구보다 더 자주 보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거주지가 서울-부산임에도 말이다.) 얼마 전엔 서울 출장길에 이 친구가 그토록 입이 닳게 말하던 '소주가 술술 들어간다'는 '양탕'을 먹으러 대림동에 갔다. 점심 겸 양꼬치에 칭다오를 열병쯤 마시고, 양탕이 나오자 정말 소주 생각이 나는 오묘하고 매력적인 맛에 '딱 소주 1병만 마시자'라는 나의 제안에 '그럼 딱 1병만'을 동의하다 결국 1병이 2병 되고 2병이 3병 되었으며, 충분한 시간을 두고 김포공항으로 출발했으나 취한 자의 발걸음이 그렇듯 구경거리 많은 대림동의 여기저기를 쏘다닌 덕분에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9시 30분 출발 비행기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언니 우리 늦을 것 같은데'라는 이 친구의 말에 지하철을 내리는 동안 어플로 예약한 택시를 갈아타고 미친 듯이 쏘아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9시 18분. 미리 받은 탑승권을 들고 게이트로 질주하였으나 거절된 탑승권이었다. (공항 도착이 늦어 항공사에서 보안을 위해 거절된 것 같았다) 얼른 아래층 항공사 카운터에 가보란 공항 직원의 말에 만취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가 다시 종이 항공권을 발급받았고 "원래 이 시간엔 안 되는 걸 해드린 거예요. 그러니 얼른 뛰세요!"라는 직원의 말에 다시 사력을 다해 뛰어 게이트와 보안 수속을 거의 프리패스로 통과하여 다행히 출발이 지연된 비행기에 마지막 승객으로  탑승할 수 있었다. 한 겨울이었으나 굽 있는 신발에 더해 서울에 온답시고 무장한 차림으로, 취기에 사력을 다한 달리기 덕분에 올겨울 최고로 핫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평소 땀이 거의 안나는 체질인데, 내려오는 비행기에서 미친 듯이 땀을 흘리며 숙면했다.


무튼 덕분에 잔잔한 내 일상에 여러 다이나믹을 함께 겪었을 뿐 아니라 올해 첫 제주여행을 함께 했고, 이번 제주여행도 함께 했으며, 여행 중 몸과 감정이 힘들 때 말없이 옆에 있어 준 고마운 친구이다. 나이는 나보다 어린데, 생각은 나보다 큰 친구 같다. 전 직장 스펙이 엄청나게 화려하지만 과감히 그 길을 접고 다른 진로로 방향을 튼 그녀는 토익공부 대~충 한 달에 900을 넘는 기염을 토하며 놀란 나에게 '물토익이었어요'라는 심플한 멘트를 쿨하게 날리는 겸손함을 가진 친구이다. 심지어 알고 보니 방송대를 졸업한 시즌도 같은데, 둘 다 성적우수를 받는 일까지 같았기에, 삶의 궤적에서 겹쳐지는 길이 몇 가닥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 인연이 고맙다. 큰 일 없이 인생에 오래 보게 되는 친구로 남게 되길 바란다.


4. 금악 오름에 함께 있던 한 사람, P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 알지만 얼굴은 모르는 사이였다.

심지어 나는 모르는 사이임에도 그에게 두 번이나 까였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거절당한, 뭐 그런 상황이었다.)


사연의 시작점은 발리로 돌아가는데, 함께 우연히 만나게 된 한국인들 중 제주에 사는 분이 있었고 그분이 제주에 놀러 오면 묵으라며 아는 동생이 운영한다는 게스트하우스 사진들을 보여주며 그곳이 그들의 아지트라고 했다. 나는 그즈음 '박원'이라는 가수의 노래에 빠져 매일 밤마다 박원 노래를 들으며 잤는데 사진 중 박원을 묘하게 닮은 인상의 사람이 있었다. 그걸 본 동생이 (위에서 언급한 A) "어! 언니랑 이어줬으면 좋겠다" 했다.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동생과 제주에 갔을 때 그분, P는 한참 유럽 여행 중이었고,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카톡으로 소개를 제안했으나 '장거리 연애는 안 한다', '연애 생각 없다' 등등.. 그렇게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까인 것이었다.

이번 여행 이전 A는 10월에 제주에 한 번 더 갔었는데 그때 나를 대차게 깐 P를 게스트하우스 술자리에서 실제로 만나게 되었고, 다들 술이 오른듯한 자리에서 갑자기 나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와 한참을 자고 있던 중이라 거절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늦은 밤 시간이라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알고 보니 대화 주제는 나를 깐 그분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었고 내가 술자리의 안주가 된 듯 한 상황이라 스피커폰으로 전화 내용이 모두에게 생중계되고 있다는 걸 파악 후, 내가 주접을 좀 떨어 주었다. "당신은 저를 깠지만 전 당신을 사랑해요~" 등등. 여기저기서 폭소가 들려왔지만 술자리 안주 좀 되어주지 뭐, 싶었던 것이다. 사실 A와 같이 가기로 한 제주행이었는데 내가 일이 바빠 갑자기 가지 못했고 A 혼자 가야 했던 여행에서 외로워하던 차에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분위기 좀 맞춰주자 하는 심정이었다. P를 볼 일도 없을 거고.


그런데 이번 여행에 그를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망할 젠장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주접 좀 작작 떨걸!!!!!!!!!!!!!!!!!!!!!!!


P와 실제 만나게 된 사건은, 그러니까 아주 단순했다.

올해 발리 여행 이후 갔던 첫 제주여행에서 제주 사는 분과 A, 나 이렇게 셋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 제주 사는 분이 아는 동생을 데려왔고 우리는 오히려 그 분과 친해졌다. 그래서 이번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자신들의 아지트인 게스트하우스로 오라 했고, 알고 보니 그 날 P의 생일 파티를 겸하는 자리였다. 숙소에서 쉬다가 뒤늦게 도착해 아는 사람도 없는지라, 맨 끝자리인 A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모서리 바로 옆, 그러니까 바로 옆에 앉은 분이 바로 P 였던 것이었다. 오 마이 갓.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나와 초면임에도 내가 P에게 장난스럽게 '만나기도 전에 거절당한'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그날의 주인공이자 성격이 순한 듯 보이는 P를 모두가 '다시 놀리는' 분위기가 되었고 나는 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춰 주었다. (이때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런 분위기가 지속되자 P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자신은 이렇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놀리는 것도 너무 불편하다는 말에 순간 우리 쪽은 분위기가 얼음장이 되었고 나는 뻘쭘함을 넘어 민망하고 화도 났다. 나도 좋아서 그 자리에서 그러고 있는 거 아니란 말이다..


P는 생일이었던 그 날 자신에게 일어났던 연속적인 불행들에 대해 설명하며, (토요일 '오프' 임에도 자신의 생일 당일 회사 회식에 끌려갔는데, 그게 불행의 '시작'일뿐이었다 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술 원 없이 먹고 집에 가서 뻗어 자고 싶은데 이런 불편함이 생기는 것이 싫다 했다. 덕분에 근처 사람들의 분위기가 살벌해졌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는 P 가 분노조절 장애인가 싶은 생각을 잠깐 했다.


어쨌든 장단을 맞춘 답 시고 MSG를 첨가한 나의 행동도 문제는 있는 것 같아 다들 2차를 가기 위해 분주히 청소를 하는 동안 P를 따라가 실없는 소리를 했지만 짜증은 났고, 막상 2차를 갔는데 일부러 그런 건나와 멀지만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 P의 의도는 우연인가 아니면 이건 또 뭔가 싶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본의 아니게 감정이 폭발해 화를 낸 게 미안해서 그랬다고 한다.) 나는 할 말도 없고, 불편한 마음에 맥주와 소주와 김치찌개를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먹었다. 그런데 테이블이 작은지 자꾸 앞에 앉은 P와 발이 부딪혔다.

술도 마셨겠다, 짜증도 좀 났겠다, 심술이 났다. 나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P의 다리를 더듬었다. 아주 오랫동안. 첨엔 부딪힌 줄로만 알았던 P가 다리를 피했으나 이내 순순히 내 발놀림에 자신의 다리를 방치했다. 내 손은 분주히 쏘맥을 입에 털어놓고 눈은 테이블 술잔에 고정한 채, 테이블 아래 발은 열심히 P의 다리를 더듬는 상황. 이 상황이 우스워 웃음이 실실 났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P를 보았다. 

그런데 아뿔싸, P의 정색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망할.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만히 내게 다리를 맡기는 그의 행동에 '즐기고 있군' 하며 속으로 웃고 있었는데, 수용이 곧 동의의 표시인 줄 알았건 만, 표정을 보니까 아니었던 거다. 이건 그러니까 상대가 기분 나쁘다면 완전 성희롱인 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 머리가 굴러간다. 나는 내 핸드폰을 미친 듯이 뒤졌다. 10월에 A가 사람들과 장난을 치며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썼던 P의 번호가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문자를 보냈다.

'정말 미안하다, 감정적으로 불편해지는 거 나도 정말 싫어 치게 된 장난이 과했다. 성희롱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정말 미안하다'


핸드폰을 한참 보던 그에게 몇 분 후 답장이 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가서 얘기 좀 합시다'


지체 없이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바람을 쐬는 척 나갔다. 얼마 후 '어디예요' 하는 문자와 함께 P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다음 편에 계속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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