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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an 15. 2020

치트키를 쓰는 남자와 제주투어

그놈의 갬성, 갬성, 갬성- 제주 여행기 아니고 썸 스토리

자, 나는 다시 잊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쓴다. 잊지 않기 위해.

내 인생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행운 같은 시간들에 대한 기록과 내 안에만 숨겨두기 아까운 로맨틱한 기록, 무엇보다 스스로 잊지 않고 오래오래 곱씹고 싶은 기억을 남겨두기 위해.


금요일, 그러니까 헤어진 지 4일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밥을 겸한 술을 마셨지만 문제는 피곤한 탓인지 그가 바로 코알라가 된 것.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선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는 거 아닌가?라는 나의 생각은 20대 이후 지나갔건만 무언가 찜찜한 기분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건 무슨 상황인가, 그의 집에 내가 그를 반쯤 끌고 가듯 바래다주는 상황이 연출됐는데, 계속 취해가는 그의 집을 못 찾을까 싶어 가까스로 집 주소까지 적어 두면서 그를 바래다주는 것으로 아까운 하루가 흘렀다. 빡쳤다.



둘째 날은, 그러니까 제주의 서쪽을 쭉 돌아보는 투어였다.

나는 제주가 그렇게 큰 섬인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다양한 풍경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제주에 이렇게 한 해 몇 번쯤 내려오면 결국 제주살이를 하게 된다는데, 내가 꼭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처음 간 선인장 군락지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를 걸으며 바다를 보는 곳이었다. 하늘색과 청색의 바다를 보며 느껴지는 바람은 세찬데,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한참을 돌아 나오는 길의 끝엔 선인장 밭이 보였다. 아, 내가 어릴 때 억지로 먹었던 저 자주색 열매가 이거였구나, 싶으면서 어릴 때 생각도, 아빠 생각도 났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을 뿐,

이렇게 강하고 맑은 바람을 언제 맞아봤나? 싶게 청량한 느낌을 주는 바람에 기분이 참 좋았다. 

그 바람을 한참 느끼고 걸었다. 


다음으로 간 장소는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는 바닷가. 이 장소 역시 정말, 정말이지 그레이트였다. 윙, 윙 거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발전기의 거대한 날개를 한참 보며 바닷가까지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다행히 긴 패딩을 입고 가서 춥지 않았기에 풍경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직업적으로 풍력발전기가 로맨틱하게 보이진 않지만, 무튼 로맨틱한 건 로맨틱한 거다.


 마지막 선셋 포인트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지는 바람에, 중간에 차를 세우고 지는 해를 보는데 "내가 이런 일출, 일몰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던가? 아님 이 분위기에 취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들떴다. 사람 참 간사하다. 좋으면서도 왜 좋은가를 괜스레 저울질하게 된다. 무튼 그만큼 해가 떨어지는 잔잔한 풍경은 사무치게 좋았고, 해가 진 후 수월봉에 올랐을 때, 다른 사람들을 이미 일몰을 보고 다 내려간 후였지만 해 진 후의 밝은 기운은 남아 구름 뒤 어스름히 붉은빛이 보였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사진에 담지 못한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고, 세찬 바람은 담을 수 없음이 아쉬울 뿐


그는 내게 해지는 수월봉을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우리는 조금 늦었고, 날씨는 구름이 끼었다.

그러나 구름 뒤 장렬한 햇빛의 반사는 두꺼운 구름을 뚫고 나와 사방을 충분히 비추고 있었고 바다는 끝이 없이 펼쳐져 있다. 일몰을 감상하던 수월봉에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 그 역시 내가 육지에서 맞아보지 못한 상쾌한 바람이었다. 상쾌하고 청량하고, 춥다기보다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바람. 그게 너무 좋아 거기 한참을 머물렀다. 아, 금악오름에 올랐을 때의 느낌이 느껴졌다. 행복하다. 압도될 수밖에 없는 대 자연의 풍광 앞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조그맣게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이 순간 역시, 신이 내게 주신 선물 같은 것이구나.

나는 이 기막힌 자연에 다시 압도되었다.




 

해가 지는 풍경을 뒤로하고, 우리는 제주에서 핫하다는 LP바로 향했다.

원하는 노래를 신청하면 말 그대로 책꽂이처럼 쌓인 LP장에서 레코드 판을 꺼내 틀어주는데, 21세기 가요는 안됩니다 라는 문구에도 무색하게, 7시 입장 시간 전에 갔을 때도 기다리는 손님의 연령대는 다양했으며 이후에도 빈자리가 나기 무섭게 손님이 가득가득 차는 정말 핫한 곳이었다. 여기가 왜 기억에 남는지는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이미 앞서 굉장한 자연 풍경 세 곳을 본 후 감성 충만한 상태였는데, 여기서 나오는 노래들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건 뭐 음악 좋아하는 고수들이 기다렸다가 작정하고 자신들의 애창곡을 신청하는 느낌이랄까. 흔하디 흔한 곡 보다, 어디선가 들었으나 기억에 남았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정말, 황홀해서 미치겠는 심정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참다못한 내가 테이블에 엎드리자, P가 물었다.


왜 그래요?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아서요. 주체가 안돼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어요.


슬며시 웃던 P는 듣고 싶은 노래를 적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노래를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은 엄청난 선곡으로 LP바의 분위기를 갬성 돋게, 아니 아주 판을 뒤집어 놓으셨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지만 행복하고 벅찬 기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미니 와인을 한 병 원샷하고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자 취기 덕분인지 말문이 터졌다. 연애와 애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흘러나오는 "She"는 너무 드라마틱하여 내가 줄리아로버츠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고, 우리의 이야기 흐름에 딱 맞춰 나온듯한 노래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졌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해 터진 그 웃음이 얼마나 행복하던지, 무튼 둘이 세상의 주인공 같은 순간이었다.


LP바 마틸다


나는 이 글을 적는 동안에도 결국 생각나지 않는 어떤 노래 한곡과, 김광석의 노래를 신청했는데 제목이 정확하지 않았는지 틀어주지 않았다. 나의 글씨를 보고 P는 글씨체가 참 이쁘다 했다.


지금 이 사람 눈엔 내가 좋게만 보이는구나, 이 사람 나를 좋아하게 됐구나. 그의 마음이 그의 바깥으로 흘러나와 눈빛으로 말로 행동으로, 오감으로 느껴졌다.

무튼 신청했던 노래는 결국 몇 곡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분위기 맛집인 그곳의 느낌, 그 갬성, 그 분위기는 잊을 수 없이 황홀했다.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까지. 

그 자리를 채웠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만들어 낸 분위기가 너무도 완벽해서, 모든것이 어떻게 여기 이 시간 이 공간에 존재하게 된걸까 새삼 삶의 인연을 생각하게 될 만큼 모든것이 무서우리만치 완벽하게 좋았으며 게다가 P는 대체 어떤 시간을 건너와 내 앞에 앉아있게 된 걸까, 이 모든 것이 꿈같아 신에게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말 미치겠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인연이기에 나는 이 속에서 이렇게 행복할까.



암튼 오늘 이 사람, 치트키 정말 제대로 썼다. 나 같은 감정적인 인간이 감정에 푹 빠지다 못해 갬성에 취할 수밖에 없는 코스로만 나를 데리고 다녔다.


아까 이 바에 막 도착했을 때, 한 칸뿐인 화장실에서 문도 잠그지 않고 오랜 시간 화장을 고치느라 한참을 나오지 않아 뒷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던 어린 친구가 저 건너 테이블에 보였다. 일행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온 듯 보였고 그녀의 옆엔 꽃돌이로 추정되는 남자가 보였는데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저 어린 친구도 나만큼이나 행복할까. 아,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 이렇게나 행복한데..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마구 행복한 나는 타인의 행복도 마구 빌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녁을 고민하는 나에게 그가 제안 한 곳은 '사연 있어 보이는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사시미 파는 우동집'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끌린 것은 사장님이 그를 보면 기타를 들고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다가와 반주를 하며 노래를 시킨다는 것이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틀즈가 우동을 먹는 바로 그곳


우동집이라기엔 뭔가 카페가 더 어울릴 것 같은 그곳에 도착하자, 사장님은 이미 지인으로 보이는듯한 사람들과 일 잔 중이셨다. 우리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자리를 잡고 주문 후 바로 일어나 편의점으로 갔는데, 나는 이런 센스를 정말이지 좋아한다. 내가 음주 전 후로 숙취해소제를 먹는 걸 알게 된 그는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편의점엘 간 거다. 덕분에 마음 놓고 이 날도 역시 우린 먹고, 마시고,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한참 후, 어린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왔는데 사장님이 그 테이블에 P를 뭐라고 언급하셨는지, 갑자기 기타를 들고 우리 테이블에 오시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일제히 폰을 꺼내 P의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들리는 소리 '저 사람 가수래!' 하하.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단골손님인 P와 동행한 나의 정체를 궁금해하셨지만 그냥 웃음으로 때웠는데, 복수하시는 건가.


무튼, 술 몇 잔이 들어간 P가 사람들의 주목에도 아랑곳 않고 노래를 시작했다. 무대체질인가 보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내가 아까 LP바에서 제목을 생각해내지 못했던, 바로 그 노래였다. 그땐 모르는 척 가만히 있더니 여기 와서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던 건가, 싶었다. 그렇다면 그가 성공했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
세월이 흘러가네 흰머리가 늘어가네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
.
.


이상하게 결혼도 해 보지 않은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겪어보지 못한 환상 같은 것에 대한 그리움인지, 아님 그냥 가사가 아름다워서인지 눈물이 줄줄 난다. 이 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을 피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나는 어차피 사람들 눈에도 띄지 않는지라 참지 않고, 사연 있는 사람 마냥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핸드폰으로 가사를 보며 조용히 노래를 부르던 그가 고개 들어 나를 보았을 때, 눈물범벅된 얼굴에 놀란 듯 한 손으로 휴지를 집어주었지만 그보단 그의 노래가 계속되길 바랐다. 그건 그냥 감동의 눈물 같은 거니까. 다행히 P는 노래를 계속 이어갔고,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노래를 들었다.

소리 없는 눈물이 자꾸만 주룩주룩 흘렀다.


노래가 끝난 후, 눈물의 이유를 묻는 그의 말에 나는 같은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좋아서요,

너무 행복해서요.

내가 뭘 잘해서 이런 순간이 오는 걸까요?


나는 웃으며 울었고, 그는 그런 나를 조용한 웃음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떠돌이 씨는 참 예쁜 사람이네요."

이 남자, 오늘 끝까지 치트키 제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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