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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an 07. 2020

초대받은 제주행

나를 달뜨게 했던 시간에 대한 기록 - 제주 여행기라 쓰고 사실 썸탄얘기

사람 참 이상하다. 그토록 마음을 열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나는 내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내 마음이 열리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에 치여 사람에게 마음을 닫고 살았지만, 나는 또 사람으로 인해 위로받았다.




성희롱의 개념은 1도 없고,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 나를 데려가는 분위기를 가진 회사에서 참 많이도 힘들었다.  그 회사에 근무하던 4년의 시간 동안 점점 말을 잃어갔다. 연고도 없이 직장 때문에 살게 된 곳에서 연애도 하지 않으며 어떤 대외적인 활동도 하지 않는 삶이란 참 지루했고, 가끔은 나쁜 생각이 들만큼 우울했으며 그토록 기다리는 주말이면 그저 혼자 술을 참 많이 마셨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가게 된 독서모임에서, 나는 주목받았고 내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 속에서 위로받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어떤 일을 계기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혼자 버틴 4년의 시간이 나를 망친 것일까? 주사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던 차였다. 절대 밖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사람도 만나지 않으면서 나는 스스로 만든 늪에 잠기면서도 그게 질식하는 일인 줄은 몰랐다. 계속, 혼자만의 공간으로 나를 고립시켰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꼰대는 될 것이다. 그러나 나쁜 꼰대는 되지 말자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술 먹고 같은 소리 반복하며, 누군가의 아부를 안주삼아 취해 행복해하며 타인의 고통은 모르는, 그러니까 내가 수 없이 봐온 그런 인간은 정말이지 되고 싶지 않았다.




12월 30일 월요일, 제주공항은 평일임에도 북적인다. 나만 빼고 다들, 평일 하루는 써 가며 여행 정도는 가볍게 다니는 여유를 가지며 살아온 것일까? 맘이 이상하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여러모로 맘이 복잡하다. 그런 내 옆엔 P가 있다. 떠나는 걸음은 그저 무겁다.


자기와 만나보지 않겠냐는 P의 물음에 나는 어떠한 확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는 멀리 산다. 말보다 행동을 믿는 나는 그의 행동을 볼 것이고, 그에게도 나는 행동으로 보여 줄 것이다. 그런 P는 나에게 참 열심히 연락을 한다.


나의 생활패턴을 모르는 P는 액정이 고장 나 연락이 잠시 되지 않았던 하루가 몹시 불안했나 보다. 겨우 잠든 나에게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전화를 걸어 나는 놀란 채 잠에서 깨어난다. 이후로 며칠 동안 우리는 서로의 생활패턴을 알아간다. 매일 전화를 하고, 메신저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한다. 그가 가진 저음의 목욕탕 목소리는 그 그립게 만든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 인생의 궤적은 물론 외모와 성격, 생활 습관에서 어떠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는 그에게 내가 호기심을 넘어선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짧은 시간 숙면하고 이른 시간 출근한다.

몸 쓰는 일과 디자인 일을 오랜 시간 했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잘 만든다. 자신만의 공방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라 한다.

저음의 목소리를 가졌으며 뼈대가 굵은, 다부진 체형이다. 손을 맞대 보면 두께가 두배는 되는 것 같다.

나와 같은 종교를 가졌고 인생의 비슷한 시기에 또 비슷한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지만 끝내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임종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냉담자가 되었다.

나와 같은 나이의 여자 친구를 오랜 시간 만났으나 헤어졌고, 얼마 전까지 연락을 이어왔지만 끊었다. 결혼을 한다면 그 사람과 하고 싶었으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결혼 생각이 없었기에 멀어진 거리와 함께 소원해졌다. 날 처음 보게 된 자신의 생일날 그녀에게서 메시지 없는 생일 축하 케이크가 전달됐다. 그러니까 생일날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이러한 이유도 포함돼 있었고, 결국 나에게 싸늘하게 화를 낸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만 냄새를 싫어하는 나를 위해 만나게 된 날 이후로 금연하고 있다.

스킨십을 좋아하지만 타인의 시선 앞에서 내외하는 나의 성향을 고려해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걷는다.

굉장히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다정한 표정을 잘 짓고, 행동에 묻어 나오는 배려는 자연스럽다. 물 잔이 비는 것, 무언가 흘린 것, 나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물을 따라주고, 티슈를 건네주고, 필요한 것을 건넨다.

말이 없는 편이지만 자꾸만 내가 무언가를 말하도록 대화를 유도한다.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언제 또 보냐는, 낯간지럽고도 뜨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으로 오겠다고, 비행기표를 언제 끊으면 되겠냐고 묻는다. 우리는 다음 주 만남을 약속한다.


서로의 삶은 다른 곳에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비행기표를 검색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에게 토요일 약속이 있냐고 묻는다.


없어요

그럼 나, 내일 제주도로 갈까요?

정말요?! 장난이죠? 시간 괜찮아요?

이번 주 주말은 괜찮아요. 혹시나 다음 주 주말 내가 일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농담 아니고 정말이에요.

정말? 정말 내일 올 수 있어요?

네, 그런데 제가 가면 P 씨 지인 찬스 이런 거 있나요?

지인.. 이라니 너무 멀게 느껴진다. 근데 나 보러 오는 거면 숙소 제공해요. 그리고 종일 나랑 같이 있어야 해요!

정말 가요?! 정말? 정말 갈까요?

네! 와요! 당장 숙소 예약할게요. 나 퇴근시간 맞춰 올래요? 공항에 픽업 갈게요.




자꾸만 좌석이 없어지는 비행기 표를 보다가, 당장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끊는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여행을 가는 것, 이런 내 모습이 참 오랜만이라 스스로 신기하다. 월요일 돌아왔던 짐을 채 풀기도 전에 목요일에 가방을 바꿔 다시 짐을 싼다.

이번 여행은 초대를 받아 떠나게 된 여행이므로, 온전히 나만의 여행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장소와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금요일 아침부터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업무를 처리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항에 간다.

짐이 늦게 나올까 봐 부치지 않고 최대한 앞자리 좌석으로 체크인한다.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실감 나며 마음이 두근거린다.




게이트를 나가자 나보다 조금 늦을 것 같다던 그가 서 있고, 미소를 띠는 얼굴엔 숨기지 못한 행복이 묻어있다.

내 얼굴도 그랬을까, 내 눈을 보며 조심스럽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떼는 그의 입술을 바라본다.


"4일 만에 다시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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