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관심도 없던 홍콩인데, 여행을 계획하다 보니 자세히 보게 된다. 태국의 시위처럼 몇 차례 이후 지나갈 줄 알았던 일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사안 자체가 민감하고, 이번 기회가 없으면 홍콩인들은 다시는 자유를 외칠 기회가 없음을 깨닫기에 필사적이다. 국면은 살얼음 판을 걷는 듯하다.
홍콩 여행을 다녀온 이후, 상황을 더 주시하게 된다. 며칠 후 다시 계획 없이 무작정 다시 떠날 만큼 좋았던 곳이기에 (아직도 난 내가 홍콩 어디에 그렇게 반했는지 모르겠다..)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지난번 섬을 떠난 이후로, 선착장에서 만났던 홍콩 공무원 A를 만났다. 내 다음 숙소에서 집이 가까웠는데, 이후 내가 옮긴 마지막 숙소에 더 가까워 이틀 동안 열심히 함께 돌아다녔다. 아무도 모를듯한 숨겨진 동물원에도 함께 갔고 홍콩대학교 투어 도중에도 만났으며 떠나기 이틀 전날엔 술도 함께 마셨다. 홍콩에서 혼자 뻘짓 하느라 우울했던 (나 혼자 비포 선라이즈 편) 에스컬레이터 끝에 나오는 광장에 함께 앉아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게다가 그 광장에 외로이 앉아 처량하게 보기만 했던 펍에 함께 들어가 술을 마시니 기분이 더 이상하다. 며칠 전만 해도 울상으로 앉아있던 곳에 괜찮은 사람과 함께 오니 이건 운명인가? 하면서 머릿속의 망붕이..
현지인 친구를 사귄 덕분에 더 풍요로웠던 여행임을 부인할 수 없다. A가 무엇이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했다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매우 친절했지만 선을 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광장의 벤치에 앉을 땐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카프를 깔아 "함께 앉는" 상황을 만들었고 내가 들고 다니던 물병이 비었을 때쯤 커피가 마시고 싶다며 카페에 들르는 식. (선선한 홍콩의 날씨임에도 화장실을 찾지 못할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탈수가 몇 번이나 왔었다.) 무튼 부담스러워할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가끔 현지인과 동행 시 느끼게 되는 문화차이에 대한 부담감도 없었다. 보내는 모든 시간이 편안했고 즐거웠다. 마지막 날 산행도 같이 할까 했지만, 마지막 날 만큼은 혼자 마음을 추스르고 싶어 혼자 산행을 했더랬다. 며칠 후 다시 오게 될 줄도 모르고.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며칠 후 마음의 동요로 다시 간 홍콩에서 나는 그가 소개해 준 에어비앤비에 묵었는데, 그의 친구 (친구의 여자 친구)가 운영하는 집이었다. 방 하나를 게스트에서 내주는 전형적인 좁은 도시의 홍콩 에어비앤비. 그녀는 바쁜지 체크인 날 주의사항도 메모로 남겨 놓았고, 둘째 날 저녁 잠깐 얼굴을 마주쳤는데 이 정신없는 홍콩에서 어떻게 A를 알게 됐냐며 신기해했다. "밑에 펍에 가서 맥주 한 잔 할래?"라는 내게 그녀는 미치도록 급한 과제가 있다며 내일로 미루면 안 되냐고 물었다. 응 괜찮아,라고 답했지만 그녀는 다음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 친구와 있다며 미안하다는 메세지를 받았다. 젊은 시절의 불타는 로맨스를 내가 어찌 이기나. 곧이어 온 A의 연락. 늦어도 괜찮으면 만났으면 좋겠다고, 10시에 집 아래 펍에서 만나자고 한다. 홍콩의 미로 같은 내 숙소를 찾아 그가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 여행자에게 시간이 무슨 대수람.. 그 역시 내일 오후 출근이란다.
여행지에서 처음으로 모르는 이와 정신 놓고 술을 마셨다. 펍이 닫을 시간까지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심야 버스를 타고 구륭 반도 쪽으로 건너 새벽까지 문을 여는 훠궈 집에서 더 마셨다. 이런 안주에는 술이 무제한 들어가는 스타일이지만 아.. 그날은 정말이지 너무 행복했다. 맛있는 음식, 끊이지 않는 술, 이어지는 이야깃거리와 공통된 관심사가 많은 사람. 그래서 끊이지 않던 웃음. 이런 행운은 여행에서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마음껏 행복해했고 마음껏 웃었다. 이 시간이 감사했다.
이후 남은 여행 기간은 비어있는 자신의 집에서 머물 것을 권했던 그의 말을 기억한다. 솔직히 말하면 고민이 됐다. 비싼 홍콩의 물가는 둘째 치더라도 그의 친절한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호의는 호의로 끝나기 어려운 법. 하루를 생각해 보겠다고 할 정도로 마음이 오락가락이었지만 결국 나는 거절했고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귀국하는 날까지 거의 매일 저녁을 같이 먹었다. 떠나는 날 저녁,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선물을 준비했고 나 역시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받았다. 숙소로 돌아와 풀어보니 시계다.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 의미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거의 10일을 내리 봤기에 정이 많이 들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오겠다는 걸 억지로 말렸다. 떠나는 발걸음이 울적할 것 같았다. 다행히 낮시간 비행기 었다.
공항으로 떠나는 버스로 밖 차창 풍경을 본다. 디즈니랜드를 가지 않은 게 하나도 아쉽지 않다.
핸드폰을 꺼내 A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고마웠다고 말하며, 언젠가 한국에서도 보자는 메시지를 남긴다.
전송 버튼과 동시에, 긴 메시지가 왔다.
예상치 못했으나, 예상했던 내용
" D, 네가 돌아간 뒤 사흘 뒤 다시 왔을 때, 나는 그 이유에 내가 조금은 포함되어 있을 줄 알았어. 그러나 친구를 강조하면서, 옛 연인에게 상처 받은 일에 대해 말하는 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러면서도 연애는 좋은 거라고 말하는 널 보며 헛갈렸어. 아니 사실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어. 소호 거리에서, 한국인들에게 이 에스컬레이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며 여행에서 잠시 마음을 줬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질투가 나더라. 에스컬레이터의 끝에 나오는 광장에 앉아 있을 때 너의 표정을 보며, 펍에서 행복하다고 할 때, 너를 보며 행복했어. 이제 이 곳은 너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서.
네가 돌아간 날부터 오랫동안 계속 너를 생각했어, 네가 다시 홍콩이라고 했을 때 나는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장난 같았어.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항구로 나가서 소리를 질렀는데. 진짜야.
네 일정 때문에 우리 가족과의 식사를 거절한 날, 너는 그냥 친구와의 식사자리를 거절한 거였겠지만 나는 내내 마음이 아렸어. 네가 왠지 더 다가오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아서. 나중에 오해는 풀렸지만, 그래도 혼자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우습더라도 내 성격이 좀 그래.
너와 함께 밥을 먹고,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탔을 때, 또 산책 가자며 숙소에서 슬리퍼 차림으로 화장기 없이 나온 널 봤을 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 너는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너의 일상적인 모습을 본 기쁨과 내가 그 일상의 일부가 된 것 같아 기뻤어. 넌 모르겠지 그 기쁨을, 내가 너에게 가깝고 편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그 기분과 그 풍경들이 얼마나 내 머릿속에 아름답게 남았는지. 이제 나는 그 장소를 걸을 때마다, 너와 갔던 모든 길마다 네가 생각 날 거야. 너와 갔던 모든 곳이 이젠 너 일거야. 내 마음을 모두 전하기엔 사실 텍스트론 부족해.
D, 떠나는 길 함께하지 못했지만 너의 의견을 존중해. 안전한 여행이 되길 바라고, 또 고민하던 일들이 모두 다 잘 해결되길 바라.
그리고 내가 생각난다면 언제든 연락 줘. 홍콩에 다시 왔을 때 내 메시지를 보고도 연락을 준다면 그때는 우리가 조금 다른 사이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해도 될까? 언제나 너를 생각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음을 기억해 줘.
너의 평화로움을 기도하며, "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받은 한 편의 편지 같은 고백이, 담긴 진심 때문인지 아니면 떠나는 사람의 아쉬움인지, 끝내 모른 척했던 그의 마음에 대한 아쉬움인지 눈물이 났다. 아마 사람들은 내가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았을 거다. 훌쩍거리며 티켓팅까지 하니 이제 내가 아무 감정의 동요 없이 홍콩을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번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그는 먼저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고 나 역시 무료한 듯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홍콩의 소식을 접한다.
홍콩의 상황은 어지럽고 인권과 사회권은 아슬아슬하게 그 경계에 걸쳐 있어 홍콩인들의 투쟁은 격렬하다. 그리고 나는 본다. 거리에 있던 경찰들이 지하철까지 쫓아 가 시민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모습을. 그리고 나는 본다. 내가 A를 처음 봤던 날 그 유니폼, 그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시민을 폭행하는 모습을.. 소름이 돋고, 공포로 생각이 마비되는 느낌에 언다. 저건, 그저 지나칠 수 있는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잊고 있던 A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짓던 A, 치아가 참 멋졌던 너도 저기, 저 현장에 있을까.. 상사의 명령을 따라, 시민들과 대치하고 그 긴장된 상황을 견뎌내고 있을까.. 아니 너도 누군가의 희생양으로 거리에서 스러져 가고 있을까...............누군가에게 법 아래 폭력을 가하며 가슴속은 갈등으로 요동치지 않을까..... 혼자 뉴스를 보며 운다. 인권 유린의 현장 때문인지, 중국의 악법이 언제든 내 자유 역시 침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인지, 홍콩인들에 대한 안쓰러움인지, A에 대한 안쓰러움인지.. 갑자기 머릿속에 '컬링 하는 멋진 오빠'로 리뷰를 썼던 드라마 시리즈가 생각난다. 시위하던 주인공의 아빠를 때렸던 의경의 헬멧이 벗겨지던 순간 보이던 얼굴은 존경하던 선배.. 고통스러 하던 주인공의 마음.. 내가 그 드라마를 인상 깊게 봤던 건 우연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