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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Dec 20. 2023

작은 변화가 모이면

수막새를 만들다가 깨달은 것




오늘 아침 처음 본 것은 블라인드 모양으로 조각난 가을 햇살이었다. 무려 일주일이나 되는 긴 연휴가 끝나가는 늦은 오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빈다. 멍하니 거실에 무질서하게 누워있는 햇살을 바라보다가. 죄책감을 느낀다. 이래서는 안 되지 않나.

며칠 전에 재미있는 심리테스트를 하나 했는데 노예 근성을 알아보는 내용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선택했는데 나는 '자본주의형 노예' 성향이란다. 나만 이런 건 아닐 걸, 하는 마음에 다른 유형의 퍼센트이지도 살펴봤는데 아이고, 나는 꼴찌에서 두 번째. 빼박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본투비 노예는 사무실로 향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 가장 달라진 점은 시간 사용이 아닐까. 이전에는 연휴가 3-4일이라면 우리 가족 간의 식사, 하루 정도 방문하는 조부모님 댁, 그리고 나면 온전히 이틀은 나의 것이었는데. 이제는 3-4일의 연휴를 두 가족에 쪼개어 쓰게 되니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물론 친척들과 만나는 것도 어렵다. 전화 한 통으로 안부를 물을 뿐.


첫 연휴때는 이 점이 참 아쉬웠다. 남편에게 조금 짜증을 냈던 것도 같다. 

추석과 설. 한 해의 막바지를 위해 준비하고, 시작하기에 참 좋은 시간인데 나는 잡채 먹고 갈비 먹다가 끝난다고. 분명 좋은데, 이 편안함이 뭔가 불편하다고. 
 서너 번의 명절을 보내다 보니, 그 어색함은 많이 가라앉았다. 시댁에서 머무는 동안 내 시간을 만드는 법도 나름 터득했고. 그래도 역시 4일 정도의 연휴는 짧기 마련인데 다행히 올 해 추석은 개천절 임시공휴일과 겹쳐 무려 6일이다. 아직 온전한 이틀이 남았다.

주차를 하고 3층으로 올라와 사무실 문을 연다. 집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햇살이 길게 늘어 서있다. 

창문을 열고서 기계들이 줄지어 서있는 작업실로 들어선다. 참 많은 물건들이, 오밀조밀하게 누워있다. 이 많은 물건이 작년 이맘때만 해도 지금 사무실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곳에 들어차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1년, 와, 정말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작년 추석에도 오늘처럼 단체 주문건을 만들고 있었다. 작년에는 나비 날개 300개였는데 올해는 캔버스 200개다. 10평이 조금 넘는 길쭉한 사무실에서, 중앙 냉난방이 나오지 않아 덥다는 느낌을 받으며 나비 날개를 잘랐더랬지. 리본을 자르고 레이저 커팅기가 잘라주는 날개를 기다리면서, 레고 창립 스토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열심히 살다 보면 레고가 될 수 있을까. 공장에서 불이 나 모든 게 홀랑 타버려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어쩌면 안센에게 그건 용기가 아니라 유일한 선택이었을까. 

동생은 이제 에어아시아의 승무원이 되어 세계 곳곳을 날아다닌다. 지금은 베이징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마도. 함께 일했던, 작년 이 맘 때 그만둔 그녀도 잘 지내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가며 잘 살아간다. 변화는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릴 것 같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부수어진 안정 위에 다시 새로운 일상이 싹튼다.

집과, 일터가 모조리 낯선 곳에 세워진다는 것은, 1년 넘게 함께 일해온 사람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 새로운 팀을 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천 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이사에 쏟아부으면서, 이 변화가 나에게 미칠 일을 계산하는 일은 무섭기만 했다.

차가운 공간에 냉 난방기를 들이고 어두운 조명을 LED로 바꾸고 칙칙한 벽면에 하얀 옷을 입히고.

모자란 수납장을 만들고, 냉장고를 바꾸고. 함께 일할 사람들을 찾으면서, 나는 조금씩 천안 사람이 되어간다.

이제는 세상 가장 편한 공간이 된 사무실에서 캔버스 위에 수막새를 출력한다.

레이저 커팅기에 비해 활용을 잘 못해서 애물 단지 같은 UV프린터가 오랜만에 한 건 하는 중이다. 레이저는 돌아가는 내내 윙윙 시끄러워서 다른 일을 하는 게 번잡스러운데 UV는 조용히 슥삭슥삭 프린팅을 하니 한결 편하다. 


이번 작업은 아주 느릿한 일이라 사실 맡을 때부터 썩 내키진 않았다. 2호 캔버스에 수막새와 탑을 각각 100개씩 프린팅하는 일인데, 처음에는 지그를 만들어 한 번에 찍으려 했지만 한 번에 6판을 정확히 원하는 위치에 나오게 하는 것에 번번이 실패해서 그냥 한 번에 하나씩 200개를 프린팅하는 중이다. 하나의 캔버스를 출력하는 데에 약 7분. 200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1400분, 22시간이 소요된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도 이건 정말이지 가내수공업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맨 처음 빛을 본 건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 키트였는데 세상에, 키트 하나에 12개도 훌쩍 넘는 구성이 들어있었다. 빨간 머메이드지 4개, 속지 4개, 봉투 4개, 스크레치 페이퍼 4개.. 등등을 하나하나 세어서 윈도우 봉투에 집어넣고, 마끈으로 리본까지 묶었더랬다.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 앉아 불쌍한 큰 딸, 언니, 누나를 도와 리본을 자르고 묶고 담으면서 이게 무슨 꼴이냐며 많이도 웃었다. 시간이라도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노동집약적인 일을 지겨워하며 이제 좀 지식산업 비슷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매일 고민한다. 몸으로 일하지 않고 머리로 일해야 하는데 말이지, 하면서. 누군가에게는 정말 쉬울지 모르는 - 시스템을 만든다, 머리로 일한다, 라는 것이 내게는 아직도 참 어렵다.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좋은 일터를 만드는 것 역시 너무 어렵기만 하다.


따끈하게 프린팅된 수막새 캔버스 하나를 꺼내든다. 이렇게 하나씩 하는 게 최선일까? 조금이라도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나는 캔버스 두 개를 일렬로 놓아본다. 한 번에 2개씩만 나와도 제작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된다. 지그 만드는 건 실패했지만 두 개정도는 딱 맞게 출력될 수 있지 않나? 일러스트 파일을 조정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UV아래 놓았다. 프린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7분 후, UV프린터 아래에는 딱 맞게 출력된 2개의 캔버스가 놓여 있다. 성공이다! 잠깐, 한 판에 일렬로 놓을 수 있는 캔버스의 최대 개수는 3개인데.. 2개가 됐다면 혹시 3개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다시 한번 3개의 캔버스를 정렬해두고 프린터를 작동시킨다.

3개를 일렬로 놓았더니 시간은 7분보다 조금 늘어나긴 한다. 하지만 - 조마조마한 10분이 지나고, 이번에도 역시 성공! 세상에, 1시간에 8개도 만들 수 없었던 캔버스를 24개씩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엄청난 생산량 향상이다. 2시간 동안 40개가 조금 넘는 캔버스를 만든 덕분에 아름다운 오후를 만끽할 여유가 생겼다.  아직도 찬란한 가을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가며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입체카드의 모티브를 커팅하는 시간이 아쉽고, 박스 자동차의 눈알을 하나하나 만드는 게 고단해서 스티커를 만들었던 것처럼 모든 것의 생산성을 조금씩 높여 나가자. 나 사는 동안 레고 같은 회사가 될 수 있을랑가는 모르겠 다만 하나라도 어제보다 나아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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