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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Dec 23. 2023

시월의 햇살 같은 세상은.


지난 9개월 동안 나는 저 너머의 길을 하루에 두 번씩 부지런히 오갔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오가면서 한 번도 이 나무들 너머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다.

 지도에는 분명 불당 공원, 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위에 발을 딛고 걷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 왜 시월을 두고, 어느 멋진 날에를 붙였는 지 오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멋진 휴일 오후. 

비로소 감탄하며 가을의 정중앙을 걷게 된 것은, 여름 우연히 알게 된 친구들 덕분이다.


친구는 교복을 입을 때, 캠퍼스를 오갈 때, 회사 계단을 걸으면서 사귀는 것이라 – 집과 사무실 이외에 별 다를 게 없는 생에 새로운 관계가 찾아온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불룩하게 챙겨 나온 음식을 부여잡고 잔디밭의 그녀들에게 손을 흔드는 이 장면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감미로운 음악 위에 앉아 달콤한, 맵고 짭짤한, 시원하고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오늘 꾸고 있는 꿈과, 어제까지의 일상을 접시에 올려 두고 까르르 웃다가, 서로를 괴롭히는 성가신 것들을 함께 물어 뜯는다. 그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온 동네 강아지들이 한 번씩 돗자리 주변을 알짱댄다. 멀리 떠나야만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고 여겼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행복은 이토록 가까이에, 매일의 출근길 50m 너머에 늘 상 펼쳐져 있었는데. 이파리 하나하나마다 버터를 칠하는 오후 다섯시의 햇살. 고소하고 싱그러운 풀내음을 욕심껏 들이마신다. 2리터 생수병도 정크 사이즈 과자도 꿀꺽꿀꺽 먹다 보면 바닥을 드러내는데, 나무의 호흡은 모자람이 없다. 같은 지명을 공유하고 산다는 것은, 그 동네 거기 참 맛있더라는 추천에 이번 주말 바로 다녀올 수 있는 이점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별 뜻 없는 수다,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일상의 공유. 그 시간을 통해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는 든든함.


아마 우리는 타인의 꿈이 아닌, 자기 자신의 꿈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 더 빨리 마음이 맞았는 지 모른다. 천안에 사는 창업가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해서 피부 같은 후드 대신 검정 원피스까지 꺼내 입고 찾아간 충남창업마루. 케이터링을 나누는 시간에 한 테이블에 앉아 지금 하는 일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말하면서 우리는 벌써 일종의 동지가 되어있었다. 사람이 빠르게 친해지는 몇 가지 방법 중에 가장 빠른 건 함께 밥을 먹거나, 함께 조금 힘든 퀘스트를 수행하면 된다는데. 충분히 먹으며, 재밌는 만큼 고단한 사업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알고 지낸 시간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들 덕분에, 슈퍼문이 뜬 밤 노란 원피스를 입고 깡총깡총 뛰기도 하고, 독립기념관에서 하는 성대한 행사를 구경하기도 하고, 다채로운 향의 매력에 푹 빠져 아로마 향수를 만들기도 하고. 외로움이 스밀 틈도 없는 하반기를 보내고 있다.

벅차도록 충분한 행복. 음악 페스티벌에서 볼 법한 담요를 둘둘 말고 앉은 친구들 뒤로 천천히 하루의 막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월의 멋진 날에 어울리는 마무리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의 대화가 책 한 권의 무게를 가졌는가 하면, 긍정할 수 없지만. 책 한 권의 가치를 가졌는가 하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부끄럽게도 한 때는 친구와 보내는 시간마저 생산성의 잣대를 들기도 했다. 그 대화는 내게 유용한가, 그 사람은 내게 유익한가. 그렇게 자르고 세워 친 사람의 울타리가 상황의 파도 앞에서 얼마나 빠르고, 간단하게 부수어지는 지 –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바라보았다. 


사람은 사람 옆에 있을 때 가장 훌륭하다. 옆에 선 사람이 작건, 크건, 검건, 희건, 관계없이 누군가 내 시간에 들어와 먹고 마시며 숨을 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근사한 일이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각기 다르게 느끼며 살아간다. 다름이 낳은 무수한 표현이 각자에게 스미고 퍼져 사회가 된다. 이왕이면 그 물보라가 시월의 햇살 같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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