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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셔니스타 Jan 12. 2024

행복에 이르는 비용, 1000원이면 충분해

동전노래방은 사랑이지요.

 일요일 집에 있으면 한없이 게으름이 돋고 침대 위에 늘어지기 일쑤다. 그러니 일단 눈을 뜨면 무조건 집을 나서야 한다. 나는 곤히 잠든 아이를 깨워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6개월이면 신발을 걸레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 많은 딸에게 새 신발 한 켤레를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딸아이와 버스를 탔다. 아침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예상보다 빨리 시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촘촘히 늘어선 지하상가를 지나갔다. 백화점은 아직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오픈 준비로 분주했다. 너무 서둘렀나 보다. 30분 더 기다려야 한단다. 그냥 서 있기 지루해 반월당 지하 메트로 상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반월당 지하철역엔 만남의 광장이 있다. 이른 아침인데도 ‘만남의 광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광장에서 2층으로 연결된 완만한 계단을 올라가면 다양한 먹거리들을 파는 푸드몰과 아주 오래된 오락실 하나가 있다. 우리는 반월당이나 시내에 나올 때마다 그 오락실에 꼭 들른다. 게임을 하러 가는 게 아니다. 동전노래방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남편과 나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음주를 즐길지언정 가무엔 소질도 흥미도 없다. 그런데 딸은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흥이 참 많다. 길 가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불장난이에요.” 노래 제목을 말하며 흥얼거린다. 기분 좋은 날은 둠칫둠칫 깨알 같은 안무도 선보인다. 음악을 벗 삼아 하루를 보내는 딸에게 동전노래방은 최고의 놀이터다.

 작년 아파트 단지에서 5월 가정의 달 행사를 열었을 때 일이다. 초대 가수가 노래 두 곡을 불렀다. 트로트 가락의 신나는 전주가 흘러나오자, 딸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잘 추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뻣뻣하게 앉아 점잖은 체하는 가운데 아이가 흥을 감추지 못하자 신이 난 사회자가 깜짝 선물로 1만 원 상품권을 주었다. TPO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나 가무를 사랑하는데 오랜만에, 그것도 동전노래방을 코 앞에 두고 그냥 지나치는 건 딸에게 너무 잔인한 처사다. 지루하게 죽 늘어선 2층 상가를 지나 만남의 광장에 가까워지자, 아이의 걸음이 바빠졌다. 어딜 가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두컴컴한 오락실에 들어서니 오락 기계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탕탕탕” 총소리와 “이얍, 휙휙” 모니터 속 스트리트 파이터들의 기합 소리가 바람을 가르는 싸움 소리와 함께 들렸다. 군데군데 앉아 오락 삼매경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오락실을 찾은 우리 모녀를 신기한 듯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손을 바쁘게 놀렸다. 우리는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미니 노래방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았다. 지갑에서 빳빳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기계에 투입하는 동안 서영이는 노래방 리모컨을 두 손으로 쥐고 능숙한 솜씨로 가수 이름을 입력했다.

“서영아, 네 곡만 부르고 나가자.”

“네.”

 딸의 첫 선곡은 르세라핌의 <Perfect Night>이었다. 감미로운 기타 선율의 담백한 멜로디가 몇 초간 나오더니 영어 가사가 화면 아래 펼쳐졌다. 해외로 진출하는 K-pop 가수들이 많아서일까. 요즘 노래 가사는 대부분 영어다. 가뜩이나 생긴 게 비슷해서 가수들도 구별하기 힘든데 팝송과 다름없는 영어 가사는 최신노래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점점 떨어뜨린다.     

 엄마, 아빠도 이렇게 유행에 뒤처지는 심정이었을까? 중고등학교 시절 아빠는 이선희, 박남정, 이문세, 변진섭 같은 인기 가수들의 노래를 ‘새 날아가는 소리’라고 하셨다. 아빠는 가요무대 단골인 옛날 가수들의 구성진 가락과 간드러진 기교를 살린 트로트를 즐겨 들으셨다. 당시 젊은 가수들의 노래가 새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소리로 들렸나 보다. 나이 차이는 많지만 젊은 세대의 음악을 귀띔으로나마 들었던지라 딸아이의 선곡에 거부감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속사포처럼 흘러가는 영어 가사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부르는 딸.

 응? 뭔가 좀 이상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첫음절만 비슷하게 부르고 나머지는 “쏼라쏼라….” 말끝을 흐리는 게 아닌가! 귀신같이 박자를 맞추며 끊을 때 끊고 부를 때 부르는 모습만큼은 꽤나 진지했다. 잘하건 못하건 아이가 저렇게 신나 하니 나도 즐거웠다. 내친김에 옆에서 탬버린을 찰랑찰랑 두드리며 흥을 돋워주었다.

 다음 곡은 서영이의 모닝 애창곡인 싸이의 <예술이야>였다. 이 곡은 서영이의 등교 리츄얼곡이다. 학교 갈 준비에 여념 없는 아이의 방문을 열면 싸이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웅장한 음악으로 흘러나와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높낮이는 없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맛깔나게 불렀더니 90점이 나왔다. 서영이는 자기 점수를 확인하더니 만족한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리모컨을 눌러 고른 세 번째 곡은 우효의 <민들레>였다. 이런 노래는 분명 딸의 취향이 아닌데. 서영이는 요즘 내가 20대 때 듣곤 했던 노래들을 자주 듣는다. ‘개똥벌레‘, ’ 혜화동‘, ’ 이젠 잊기로 해요’ 내 속으로 낳은 딸 아니랄까 봐 노래 취향도 엄마를 똑 닮았다. 인디 성향의 쓸쓸한 목소리를 지닌 우효는 대중에겐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딸이 애청하는 곡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져서 다시 한번 놀랐다.

 걸스데이의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즐겨봤던 드라마의 OST가 귀에 꽂혔다. 갑자기 없던 흥이 샘솟았다. 나도 벌떡 일어나 탬버린을 흔들어 대며 목소리 높여 따라 불렀다. 모녀의 합동 공연이 끝나자, 화면에 팡파르가 터지며 ‘100점입니다.’라는 문구가 돋을새김으로 떠올랐다.

 “우와! 100점이래! 우리 서영이 진짜 멋지다.”

 1,000원 지폐 한 장과 15분의 시간 투자로 딸아이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갔다. 손으로 브이 포즈를 하는 딸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었다. 이제 백화점 문을 열 시간이었다. 오락실을 의기양양하게 빠져나와 내 팔짱을 꼭 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딸. 아이의 통통한 손등에 입을 쪽 맞추며 우리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흥얼거리며 만남의 광장 계단을 하나둘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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