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또각또각. 구두 굽 바닥에 닿는 소리가 복도에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강의실 B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금 전까지 왁자지껄 떠들고 있던 아이들이 후다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 물건 연필 지우개 빼고 다 가방에 집어넣어!”
나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자 아이들은 교재와 공책을 가방 속으로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강의실은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는 소리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시험지가 배부되고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나는 혹시나 옆 사람 시험지로 눈을 돌리거나 쪽지에 답을 적어 와 몰래 훔쳐보는 아이가 있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하며 강의실 이쪽저쪽을 돌아다녔다.
잠시 후 시험지를 거둬 밖으로 내어 주면 아이들은 서로 답안을 맞춰보았다. 누군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 쉬었고 누군가는 울상이 되었다. 어떤 아이는 썼다 고쳤다며 안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 조용한 소란스러움도 내가 칠판에 아이들 이름을 하나둘 적어나가면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이들 주의를 환기하고 미리 예습해 온 내용 기반으로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손을 들고 답을 맞힐 때마다 칠판 위 이름 옆에 우물 정 표시가 하나씩 추가되었고 그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에 묘한 성취감과 패배감이 스쳤다.
수업 종 치기 5분 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시 선생님이 남아서 나머지 공부할 아이 명단을 불러 주고 가방을 거둬 갔다. 재시험 빼먹고 도망가는 아이를 미리 붙잡아 두기 위함이었다. 재시험 봐야 하는 아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고 통과한 아이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오늘 집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의 선택권을 내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업 시간에 충분히 발표하고 참여한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통학버스에 올랐지만, 멍 때리거나 집중하지 않아 정해진 횟수만큼 퀴즈에 참여하지 못한 아이는 나에게 가방을 뺏기고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고개를 푹 떨군 채 터덜터덜 강의실 문을 나섰다.
깐깐한 원장님 앞에서 구두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새벽 1시가 되어도 아이들은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네이버 검색창에 학원 이름을 치면 학원 욕과 험담이 종종 보였다. 학원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 걸까? 아이들도 강사도 깡다구로 버텨야 하는 시스템에 질려 나는 2년 만에 학원을 그만두었다.
제대로 된 경험 하나 없이 의욕만 들어찼던 시절이다. 수업을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만들고 싶어 괜찮은 교수법이 있다고 하면 없는 시간을 쪼개 기를 쓰고 배우러 다녔다. 수업 중간 쉬는 시간이나 퇴근 후에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그래도 해소되지 못한 궁금증이 계속 남았다.
대구 과학대학과 자매결연 맺은 미국 UC Urvine 대학이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법인 TEFL 과정을 오픈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미국에서 온 교수 세 분이 자신이 맡은 수업 세션 동안 대구에 머물며 6개월 동안 하루 4시간씩 일주일에 세 번 강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론은 물론이고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액티비티 수업까지 배울 것이 많았다.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셋을 포함하여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동료들은 배움의 열의가 넘쳐 활기차고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새로운 교수법을 배우기에 너무 좋은 기회였지만 한 세션이 끝날 때마다 준비해야 하는 시험과 발표 수업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가장 큰 장애였다. 취업에 영어가 필수여서 대학 4년과 직장 생활 내내 영어학원을 줄기차게 다녔음에도 교수님 말이 들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갑자기 질문을 받았을 때 “음….”하다 대답을 못 하면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눈치 보며 앉아 있던 바보 같은 내 모습이 계속 떠올라 “이렇게 대답했어야지.” 하며 이불킥을 날리곤 했다.
첫 강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강사 생활을 시작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욕만 앞설 뿐 요령은 하나도 없던 그 시기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었던 건 시간을 투자하는 것뿐이었다. 원서는 물론 번역서까지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몇 번씩 밑줄 치며 읽었다. 교육학을 배운 적도 교육학 서적 구경 한 번 해본 적도 없으니 당최 뭔 말인지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생전 처음 접한 용어들은 허공에서 맴돌았다. 두꺼운 원서와 번역서를 싸 들고 도서관에서 이 삼일은 끙끙거리며 붙들어야 과제 한 페이지를 겨우 제출할 수 있었다.
수업 없는 날마다 그렇게 힘들여 책과 씨름하다 보니 어느 순간 조금씩 꾀가 나기 시작했다. 비싼 수업료를 냈으니 대충 해도 수료증은 나올 것이고 과제를 제출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뭘 그리 열심히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의 게으름이었다. 매달 공개 수업과 학부모 상담, 수업 평가가 쉴 새 없이 이어져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기도 했다. 그 순간만 모면하면 되겠다 싶어 대충 책에서 중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하고 거기에 내 의견을 약간 보태어 과제를 제출했다.
정성 들여 제출한 과제물에는 빨갛게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물음표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꾀를 피우며 제출한 과제물에는 아무런 피드백도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수료식 날 마지막 발표 수업 의견을 구하려고 교수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교수님은 반갑게 맞아 주시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주제를 확정하고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눈 후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데 교수님이 물으셨다.
“영주 씨의 예전 과제에서 보이던 자신만의 경험과 현장에서 나온 고민이 나는 참 인상 깊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고민을 찾아볼 수 없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머뭇거렸다. 학원 일에 집안 문제까지 겹쳐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인데 이 와중에 비싼 돈 들여 공부까지 하려니 너무 힘이 들어 내가 도대체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후회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내 영어는 그런 말을 구구절절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하지 않았다.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리는 교수님께 말씀드릴 단어를 떠올리느라 나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다들 잘 따라가는데 나만 영어 실력이 달려 수업을 못 따라가고 있으며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만 앞설 뿐 나아지는 게 하나도 안 보인다고 더듬거리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빙그레 웃으며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내게 물었다.
“영주 씨는 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나요?”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이야 동료 강사 하나 없이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있지만 예전에는 힘든 하루가 끝나면 퇴근길에 친한 강사들과 삼삼오오 맥주 한잔 나누며 아이들과 학부모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어휴, 내가 진짜 돈 때문에 참는다. 안 그랬으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야.”
진심이었다. 월급을 좀 더 올려주는 학원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직할 수 있었던 그때의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았고 쓸데없는 권위가 하늘을 찔렀다. 높은 기준을 세워 두고 통과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물리적인 해를 가했다. 어떻게 그것도 못 하냐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수업 시간에 조금만 마음에 차지 않아도 고함과 폭언을 일삼았다. 내가 제대로 설명을 못 해놓고 아이들 수준이 낮아 이해 못 한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