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인생 터널을 지나며
그렇게 시댁 식구와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남편이 예약한 숙소는 감포의 횟집 딸린 펜션이었다. 다섯 명이 매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자니 요즘 같은 물가에 돈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고 재료를 사 가서 밥을 해 먹자니 요리 못하는 나와 시누이를 대신해 어머님이 또 두 팔 걷어붙이실 게 뻔했다. 그래서 남편이 생각해 낸 방법은 인당 6만 원으로 숙소와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도 모시고 가는데 숙소가 불편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나에게 남편은 봄에 직원들과 한번 가 본 곳이라며 안심하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모든 것이 내 예상과 사뭇 달랐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는 목조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숙소가 3개 있었는데 각 숙소의 통창 바로 앞 테라스에 나무로 짠 간이탁자와 벤치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맞은편 방파제 너머로 파도가 넘실거리며 감포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닷바람이 꽤 시원해서 밤에 모기만 잘 쫓을 수 있다면 파도 소리 들으며 맥주 한잔 마시기 딱 좋을 만한 공간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하지만 현관문을 열자마자 우리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말이 펜션이지 민박집이라 해도 아무도 토 달지 않을 방 하나 달랑 있는 원룸이었다. 들어서는 순간 퀴퀴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성인 다섯 명이 딱 붙어 일자로 누우면 꽉 찰 만큼 작은 크기의 방이었다. 구석에 사용감 없이 호젓하게 놓인 싱크대에는 가스레인지도, 그릇 하나 수저 한 벌도 없었다. 밥을 지어먹을 계획은 아니었지만, 맥주 안주 담아낼 용기 하나 없다니 기가 찼다. TV는 또 어떤가. 코가 닿을 듯 화면으로 가까이 다가가서야 출연자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에어컨은 평수보다 용량이 적은지 한참을 틀어두어도 땀이 마르지 않았다. 모두 시원한 바람 한번 쐬려고 에어컨 바로 아래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저 자리를 사수해야 잠이라도 제대로 잘 것 같았다. 욕실은 두 사람이 들어가면 몸을 돌리기도 불편할 만큼 작았다. 수압이 낮아 찔끔거리는 수돗물은 온도 조절이 되지 않아 극단적으로 차갑거나 뜨거웠다.
이런 곳에서 시댁 식구와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을 채근해 알고 봤더니 남편이 직원들과 갔던 곳은 다른 횟집에서 운영하는 바로 옆 신축 펜션이었다. 가성비 좋은 숙소와 식당이었기에 일찍 예약이 마감되었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자 근처는 모두 비슷하겠거니 생각하고 옆집을 덜컥 예약해 버린 것이었다. 평소 여행지 숙소나 식당은 내가 알아보고 결정하는 편이었지만 시댁 식구와의 여행이니 남편에게 일임했던 낯선 구실이 내 첫 번째 잘못이요, 남편 말만 믿고 숙소 위치나 후기 한 번 검색해 보지 않은 무관심이 두 번째 잘못이었다. 우리의 어리석은 만행을 통탄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우리는 숙소 내부가 너무 덥다는 둥 너무 좁다는 둥 갖은 변명을 다 대며 다른 방으로 바꿔 달라고 읍소했지만, 주인은 성수기라 남은 방이 없다는 냉랭한 답변만 반복했다.
“괜찮다. 경치도 좋고, 바닷가 바로 앞에 이만하면 대궐이지.”
어머니의 호쾌한 말씀에 좌불안석이던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감포 해변은 방파제 너머로는 지척이었지만 바닷물에 발을 담글라치면 방파제를 우회하여 족히 15분은 걸어야 해변 백사장에 닿을 수 있었다. 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딸아이 성화에 못 이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뜨거운 태양 아래 숙소를 나간 지 5분 만에 우리는 다시 후덥지근한 방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열기가 아니었다.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착 달라붙어 에어컨과 선풍기를 최대로 틀어놓고 바람을 쐬니 그나마 조금 살 만해졌다. 접촉 사고와 뒷정리 후 숨 한번 돌리지도 못하고 바로 감포로 오느라 피곤했던지 남편과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윽고 5시가 되었다. 저녁 식사 시간을 못 맞출까 봐 미리 맞춰 둔 알람이 울리자 우리는 여기저기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음식은 맛있어야 할 텐데.” 100점 만점 10점도 주기 아까운 숙소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혹시 음식마저 엉망진창이면 당장 짐을 싸 대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이 있었다. 숙소에서보다 바다가 훨씬 더 가까웠다. 시야가 탁 트인 2층 통창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각종 해물을 비롯해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횟감은 양도 많고 싱싱해 보였다. 광어와 우럭, 숭어는 쫄깃쫄깃 감칠맛이 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리비와 소라도 씹을수록 탱글탱글했다. 미역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도 홀딱 반해버린 성게미역국은 알싸하고 깊은 바다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두 그릇을 해치우고도 모자라 냄비째 들이키고 나니 잘 삶긴 소면이 초고추장과 참기름을 휘감고 탁자 위에 자태를 드러냈다. 소맥을 한잔씩 말아 들고 우리는 건배를 외쳤다. 눈도 입도 즐거운 바다의 향연을 만끽하며 술 한잔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자 하루를 지배하던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건강상의 이유로 요즘은 술을 잘 드시지 않는 어머니도 소주를 따라 드리니 홀짝홀짝 들이키셨다.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요, 언니. 그래도 몸 다치지 않은 게 어디예요.”
“그래,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지. 차 망가지면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네가 다치면 어쩌냐?”
“진짜 큰일 날 뻔했지.”
술잔 쨍 부딪히는 소리가 휘영청 밝아진 감포의 달빛 속으로 흩어졌다.
밥값보다 많이 나온 술값을 지불하고 어둠이 거뭇하게 깔린 바닷가로 나왔다. 기묘하게 생긴 바위 앞에 다다르자 시누이가 갑자기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신혼 때를 제외하면 어머니와 여행한 적이 없어서 함께 찍은 사진도 거의 없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한 첫 해, 회사 리조트를 예약해 함께 다녀온 게 어머니와의 첫 여행이었다. 시아버님이 우리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 주셨고, 직장 생활과 신혼 생활에 한창 재미를 느낄 때였다. 아가씨도 결혼이라는 무덤으로 들어가기 이전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우리 부부는 인생의 가장 빛나는 지점에서 바닥을 알 수 없는 지하 세계로 고꾸라졌다. 만신창이가 되어 시댁으로 들어선 우리에게 돼지고기와 묵은지를 듬뿍 넣은 얼큰한 김치찌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고봉밥으로 퍼담아 한 상 차려 주시며 뭐 그깟 일로 풀 죽어 있냐고, 인생이 얼마나 긴데 벌써 그렇게 지치면 어쩌냐며 먼저 어깨를 다독여 주셨던 어머니, 오갈 데 없던 우리에게 먼저 손 내밀어 같이 살아보자고, 하루하루 힘을 내어 살다 보면 또 좋은 날 있지 않겠냐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옆에 나는 딱 붙어서 섰다.
“자, 찍습니다, 치즈.”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방파제 둑을 따라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에 거나하게 취한 어머니가 흥에 겨운 듯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셨다. 자식들은 세상 풍파를 겪을 때마다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여든이 넘은 노모에게는 쉰이 넘어도 여전히 품 안의 자식이었다. 자식 걱정에 바람 잘 날 없지만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나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하루만큼의 행복에 함박웃음 짓는 어머니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직장을 잃고, 이혼하고, 재산도 집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와도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들은 후 아무렇지 않게 밥상을 차리고 자식들을 먹였다. 그 강건함이 소리 없이 부는 작은 바람에도 호들갑 떠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애미야, 다 지나간다. 마냥 나쁜 것도 없고, 마냥 좋은 것도 없다. 궂은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고, 좋은 일 뒤에 궂은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내는 거지.”
혼잣말하듯 말씀하시는 어머니 뒤를 따라 걷는 동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갛게 충혈된 눈을 손등으로 연신 문질렀다. 그날 시누이와 남편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 서로가 지녔던 케케묵은 감정을 털어냈다. 소원해서 서운해진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 옆에 꼭 붙어 오래간만에 긴긴 단잠을 잤다.
다음 날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우리는 아침 일찍 식당으로 향했다. 전복죽과 성게미역국으로 든든하게 조식을 챙겨 먹고 서둘러 짐을 꾸린 후 숙소를 정리했다. 비록 어수선한 여행이었지만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전날 늦게까지 마신 술로 숙취가 가시지 않은 아가씨는 뒷좌석에서 곤히 잠들었다. 어머님은 깊은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창밖 풍경만 바라보셨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갑자기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목과 허리가 쑤시고 결렸다. 사고 직후 너무 정신이 없었던 데다 병원에 들를 겨를도 없이 감포로 왔다.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야 몸이 탈이 났다고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대구에 도착하면 병원부터 가 보라며 남편이 운전하다 말고 폭풍 잔소리를 해댔다. 보험회사에서 사고처리를 위해 여러 부서에서 계속 전화가 걸려 왔다.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한 달이 흘러간 기분이었다.
차가 터널 속으로 진입했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귀가 멍해졌다. 갑자기 밀어닥친 어둠과 고요함이 익숙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터널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 지금 내 마음이 딱 이렇구나."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구토가 치밀어 오르며 숨이 가빠왔다. 나는 들숨과 날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가방 속으로 손을 넣어 이어폰을 찾아내 귀에 꽂았다. ‘쏴’ 하는 파도 소리가 묻어나며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그때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터널에 뾰족한 햇살 한 줄기가 날아들더니 하얀 섬광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전날 밤 어머니께서 중얼거리던 ‘다 지나간다.’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인생에 찬란한 태양만 있을 수는 없다. 늘 제자리인 학원 일도 귀찮은 사고 수습도 늘 어렵던 시댁 식구와의 여행도 좁고 어두운 터널처럼 언제나 끝은 있다. 인생에서 종종 마주쳤던 터널을 지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조급했던가. 이 힘든 상황은 도대체 언제쯤 끝날까? 끝이 있기는 할까? 죽을 때까지 힘들면 어떡하지? 한시도 마음 편한 적 없이 고된 삶을 사셨던 어머님의 긍정 회로는 참고 견디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반드시 광활한 끝이 있다는 데에 기인했다.
너무 힘들어 꼼짝달싹하기 싫은 날도 그 끝을 향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하루의 여정이다. 멋진 식스팩을 갖기 위해서 하루 한 시간 근육이 찢어질 만큼의 고된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야 하듯 멋진 끝맺음을 원한다면 고민 따위로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그날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야 한다. 만족스러운 몸매가 금방 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다음 날 아령을 들었을 때 전날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순간이 틀림없이 온다. 내 근육이 한 뼘 자라는 순간 말이다. 힘든 상황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황을 긍정하며 또 하루 열심히 살아내다 보면 생각의 궤도가 바뀌고 행동도 변하여 상황을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그렇게 힘을 기르며 나아가다 보면 때가 되어 터널에서 벗어나 환한 빛을 만나게 된다. 그 빛이 더 반가운 존재가 되게 하는 건 어둠 속에서의 긍정적 마음가짐과 실행이다. 일도 안 풀리는 데다 사고까지 당해 머리가 지끈거릴 때 어쩔 수 없이 떠나온 여행이 지나고 보니 신의 한 수였다. 의욕이 갑자기 차올랐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부터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와 살짝 미소 짓는 내 얼굴이 차창에 반사되어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