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내게 다가 온 한 줄기 빛
“에이, 한 권 더 주세요. 멀리서 왔는데.”
“죄송합니다, 아무리 멀리서 오셨어도 덤으로 드리지는 못합니다.”
단호하지만 친절한 표정으로 철벽 치는 여자와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책 한 권을 더 달라고 계속 졸라대는 남자 사이에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그의 뒤로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정체된 쪽의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겨 책을 샀다. 줄이 점점 짧아졌고 아직도 주최 측과 실랑이 중인 문제의 남자 뒤로 내 차례가 다가왔다.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남자였다. 한여름도 아닌데 하얀 팔 토시를 끼고 있었다. 화상 자국처럼 얼룩덜룩한 흉터가 토시에 미처 덮이지 못한 긴 팔 사이로 보였다.
‘뭐야, 조폭인가?’ 나는 옆에 서서 그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오뚝한 콧날 위에 걸쳐진 금테 안경이 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얇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남자는 지친 기색도 없이 계속 책을 한 권 더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10분도 넘게 같은 답변으로 일관하던 여자는 마침내 짜증이 극에 달한 표정으로 신청서 한 장을 들이밀었다.
“여기 등록하시면 제가 사비로 사서 한 권 더 드릴게요.”
“콜!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남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신청서를 받아 펜으로 뭔가를 끄적이더니 잠시 후 책 한 권을 결제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2011년 6월, 남편은 공인 중개사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방송통신대학교 영문학과 4학년 1학기 기말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당분간 우리는 주말마다 딸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 근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2년 전 아깝게 2차 시험에서 쓰디쓴 고배의 잔을 마신 후였기에 다가올 시험에 꼭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남편이 공부에 열중하는 동안 나는 머리를 식힐 겸 도서관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그날 ‘포커스 리딩’과 ‘포커스 싱킹’을 출간한 박성후 작가의 강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독서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경험을 소개하고 책 한 권을 100번씩 읽으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 강의였다. 2시간 동안 강연을 듣고 나니 평소 책이라고는 라면 냄비 받침대로만 사용하던 나도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올랐다. 작가 친필사인본을 사려고 줄을 서 있다 두 사람의 실랑이질을 목격한 후 뻔뻔함으로 무장한 그 남자에 대해 얼른 남편에게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자가 받아 간 신청서가 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판매용 책 사이에 놓인 홍보물 한 장을 가져와 읽어 보았다. 반월당 부근에서 ‘엄마 학교’라는 수업이 진행된다는 내용이었다. 박성후 작가가 책 한 권을 100번씩 읽히며 딸에게 직접 적용했다는 독후활동인 원북 원페이지(One Book, One Page)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자녀를 두었거나 독서로 자녀를 교육하고 싶은 학부모, 책 읽기에 관심 있는 일반인은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다. 마침 딸아이에게 매일 밤 책을 읽어주며 책이 주는 기적의 힘을 여실히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 비법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을 넘어 16만 원이라는 교육비는 당시 내 형편에 너무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때마침 일하던 학원이 무리하게 분점을 내면서 원장님의 재정 상황이 나빠졌고 함께 일하던 강사들의 월급도 밀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정산하겠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던 원장님도 시간이 갈수록 말을 아끼더니 나중에는 학생 신규 상담을 하러 올 때를 빼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학원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도 여러 번 밝혔지만, 그때마다 미안하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학원에 나오는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하고 떠날 수는 없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하며 시간 되는 대로 과외를 구해 겨우 입에 풀칠했다. 얼마 안 되는 과외비와 몇 차례 독촉해야 겨우 입금되는 월급 일부는 통장에 닿자마자 각종 공과금과 카드값으로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현금 16만 원의 교육비는 내게 너무 큰 사치였다.
홍보물과 신청서를 들고 와 열람실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으려니 남편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 다음 기수를 모집하면 그때 신청하겠다고 말을 돌렸다.
“그 수업 당장 신청해. 지난달 계약 건 내일 잔금 받으니 그걸로 충당하면 돼.”
남편의 든든한 한 마디에 할미꽃처럼 동그랗게 굽어 들던 허리가 해바라기처럼 일자로 쫙 펴졌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남편이 가장의 무게를 나눠지지 못해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반색하며 고마워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하고 당당히 16만 원을 보냈다. 송금 완료 문자까지 보냈으니 이제 수업 들을 일만 남았다. 수업 전날 나는 너무 기대한 나머지 밤늦도록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목요일 아침 들뜬 마음을 다독이며 교육 장소로 향했다. 지하철역 밖으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신축 아파트 상가 사무실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강의실은 준비하느라 분주한 직원 외에는 코빼기 비추는 사람 하나 없었다. 강연회 당일에도 책을 사 가는 사람은 있어도 엄마 학교에 대해 문의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전 과외 수업도 빼고 전날 밤잠까지 설쳐가며 부풀었던 마음이 혼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바뀌려는 찰나 한 분이 후다닥 뛰어 들어와 가쁜 숨을 내쉬며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뿐이에요?”
“네, 그런가 봐요.”
우리는 머쓱하게 앉아 강의실에 마련된 커피만 홀짝거렸다. 이윽고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강연회를 마치고 책 한 권 더 달라며 떼쓰던 남자를 대적했던 여자분이었다. 독서로 세상을 바꿔 보자는 구호를 걸고 박성후 대표와 의기투합하였다는 정재은 선생님은 책을 읽은 후 생각을 정리하여 요약하는 원북 원페이지(One Book, One Page)를 전국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인기 없는 수업을 수강 신청한 듯한 나의 후회스러운 표정을 눈치챈 듯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기록해 온 독서 노트 여러 권을 펼쳐 보여주었다. 제목과 읽은 기간, 줄거리를 나열하고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이 빼곡하게 기록된 노트를 뒤적거리며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한 줄 요약으로 끝을 맺었다. 그 한 줄만 읽어도 책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초보 독서가가 보기에도 선생님의 독서 이력과 기록 능력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정말 독서에 진심인 분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다 옆에 앉은 수강생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 책을 가까이하고 있으며 이번 기회에 속독과 원북 원페이지(One Book, One Page) 기법을 배워 수험생 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분도 선생님의 내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우연히 건져 올린 조개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몇 분 전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던 실망감과 불안감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참에 독서로 재미도 얻고 기록하는 습관도 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분의 소개가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갑자기 내 소개를 하려니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책은 초등학교 다닐 때 세계 명작 동화를 읽은 게 전부였다.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부터 주섬주섬 늘어놓는 나에게 선생님은 엄마 학교에 동참했으니 독서로 바뀌게 될 제2의 인생 첫걸음을 내디딘 거라며 응원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은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태도로 수업을 시작했다. 강의 내용이 공감 가는 예시와 함께 귀에 쏙쏙 들어왔다. 선생님은 넘치는 열정으로 우리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도록 경험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풀어주셨다. 수강생 두 명이 차지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값진 수업이었다.
3차시 속독 수업 시간이었다. 비슷한 내용의 책을 열 권쯤 읽다 보면 다음 내용이 무엇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책 한 권을 빠르게 반복해서 읽다 보면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내용이 점차 선명해진다는 원리였다. 메트로놈이 똑딱똑딱하는 소리에 맞춰 글밥이 적은 책의 책장을 넘기며 집중해 읽은 후 내용을 말해 보기로 했다. 제목만 봐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쉬운 책이었음에도 박자에 맞춰 책장만 빨리 넘기다 보니 막상 책을 덮으면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말할 수 없었다. 독서 초짜에게는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나는 오기가 생겼다.
밑줄 쳐가며 생각을 곱씹어야 하는 인문학 서적이나 다소 어려운 내용의 책에는 속독을 적용하기 힘들지만, 가벼운 에세이나 소설을 읽을 때 활용하면 시간이 절약될 것 같았다. 한 번 읽고 덮을 책을 빠르게 반복해서 열 번이나 읽을 수 있는 데다 책의 핵심을 뽑는 데 걸리는 시간도 10분의 1로 단축할 수 있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새벽에 일어나 메트로놈 소리를 들으며 읽지 않고 쌓아 둔 얇은 책을 하나씩 독파하기 시작했다. 속독 연습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지만, 책 읽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방통대 출석 수업에서 강사가 꼭 읽어 보라고 추천했던 ‘분노의 포도’는 인생 책이 되었다. 제임스 딘이 주연한 고전 영화 ‘에덴의 동쪽’의 원작자이기도 한 존 스타인벡의 거칠고도 섬세한 필력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나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그의 책을 빌려왔다. 서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오클라호마 이주민들이 빈곤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잔혹한 현실을 취재하며 자본주의의 민낯을 까발렸던 ‘분노의 포도’는 한때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혹독한 생의 폭풍우를 이기고 살아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의지까지 금기하지는 못했으리라. 책을 읽다 눈을 감으면 그가 신랄하게 그려낸 풍경이 흑백영화보다 더 생생하게 머릿속에 펼쳐졌다.
읽는 재미에 흠뻑 빠지니 책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 서 있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버스로 왕복 두 시간 이상 걸리던 출퇴근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호젓한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펼쳐 들었다. 중간에 덮으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수업을 들으며 내게 일어난 변화를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다. 수강료 16만 원이 아니라 160만 원이라 해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일어난 변화가 무색하게도 포커스 리딩 사업은 용두사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속독을 통해 단기간에 문해력이 향상될 거라 기대했던 고3 수험생의 엄마는 수업 때마다 조바심을 내더니 결국 자기 아이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다음 달 치 수강료를 돌려 달라고 했다. 지속적인 홍보와 강연에도 더 이상 수강생이 모이지 않자 한 사람만을 위한 수업을 열기는 무리였는지 선생님은 나에게 시간대를 저녁으로 옮길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침 선생님과의 일대일 수업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 답했고, 다음 달부터는 저녁 시간대로 수업을 옮기게 되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헤어지자던 고3 엄마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황량한 강의실은 작은 헛기침 소리에도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선생님은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나도 3개월이나 밀린 월급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우울했다. 독촉 문자와 전화를 여러 번 했지만,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원장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선생님, 오늘 수업 안 하면 안 돼요?”
2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