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은 아무나 하나
참기름 두른 냄비가 달궈지는 소리를 확인하고 국거리용 소고기 한 팩을 넣었다. 빨갛던 생고기가 육즙을 품고 잘 익을 때까지 소고기를 달달 볶았다. 이제 미역을 넣을 차례였다. 불려 놓은 미역을 가지러 다용도실로 갔다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주걱을 떨어뜨릴 뻔했다. 봉지 속 말린 미역이 얼마 안 되어 보여 누구 입에 풀칠하겠냐며 몽땅 꺼내 넣었던 내 불찰이었다.
물과 화학반응을 일으킨 미역이 삼단 같은 머리를 무섭게 늘어뜨리다 못해 소쿠리 밖으로 흘러넘쳤다. 마치 한여름 밤 인적 없는 호수에서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익사한 시신을 보는 듯하여 닭살이 끼쳤다. 자동차 사이드미러에도 ‘보이는 것보다 사물이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경고문구가 있다. 이놈의 미역 봉지에는 ‘물에 담그면 엄청나게 불어납니다’라는 문구 하나 찾아볼 수 없다니 요리와 담쌓고 사는 나 같은 불량 주부를 무시한 괘씸한 처사였다.
나의 무지함을 탓하며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불어 터진 미역은 이미 처치 곤란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찜통만 한 냄비를 꺼내 볶은 소고기를 옮겨 담고 불어서 산더미가 된 미역 다발을 끌고 와 철퍼덕 쏟아부었다. 주걱 두 개로 괴물 자장면 비비듯 들었다 놨다 온 힘을 다해 미역을 볶고 있자니 어느새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풍기기 시작했다.
‘요리 까짓거 별거냐?’
어머님도 안 계시겠다 신혼 때나 가끔 입었던 꽃무늬 앞치마를 찾아 꺼내 입고 미역국 끓이기에 심취한 내 모습이 냉장고 문에 어른어른 비쳤다. 제법 노련한 주부처럼 보였다. 나에게 앞치마는 요리하는 주부의 상징이지만 치렁치렁한 치장을 싫어하는 어머님 때문에 합가를 한 뒤로는 한 번도 걸쳐 보지 못했다.
성격 급한 어머님은 뭐든 빨리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셨다. 합가 후 첫 식사 준비를 도울 때였다. 앞치마 끈을 묶느라 꾸물대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뻘쭘하게 서 있는 나를 흘낏 보시더니 어머님은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거추장스럽게 집에서 앞치마 같은 걸 뭣 하러 입고 있어?”
시집올 때 친정엄마가 손수 골라 주셨던 꽃무늬 앞치마는 그날 이후 옷장 서랍 속에서 20년 넘게 내 손길을 기다리다 이제야 주인 품으로 돌아왔다.
앞치마 만지작거리며 상념에 잠겨 있기를 잠시, 이제 제법 맛있어 보이는 미역국에 양념으로 화룡점정을 찍을 차례였다. 가스레인지 하단 조미료 수납장을 열자 간장으로 보이는 두 개의 병이 놓여 있었다. 정체불명의 작은 입자가 둥둥 떠 있는 첫 번째 간장병을 열어 냄새를 킁킁 맡아 보았다. 짠 내가 콧속 끝까지 훅 들어왔다. 이건 패스. 눈에 익은 다른 병을 꺼냈다. 가끔 군만두를 해 먹을 때 고운 고춧가루에 섞어 먹던 진간장이었다. 칠흑 같은 까만색이었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처음 열어 보았던 이름 모를 간장보다 맛있어 보였다. 둘의 용도가 다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느 간장을 넣어야 하나 싶었다.
‘고민할 거 뭐 있어? 뭘 넣든 맛있으면 그만이지.’
진간장을 한 국자 넣고 미역이 흥건하게 잠기도록 물을 부었다. 이제 끓기만 하면 맛있는 미역국을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품으며 한창 퇴근 준비 중일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밥 다 되어 가. 언제 도착해?’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아이가 때마침 퇴근한 남편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며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남편은 주방에서 앞치마까지 두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내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남편 등을 떠밀어 손 씻고 옷부터 갈아입으라며 재촉했다. 그새 나는 맛있을 거라 자신하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미역국 맛을 보았다. 간장을 과감하게 한 국자나 넣었는데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미역이 너무 많았나 보다. 이번에는 간장을 병째 들이붓고 다시 맛을 보았지만, 여전히 싱겁기만 했다. 맛도 맛이지만 색깔은 또 어찌할꼬. 시꺼멓게 변해버려 미역국이라기보다 한약을 달인 듯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나온 남편이 간을 보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간장을 많이 넣었는데도 아무런 맛이 안 나. 색깔은 또 왜 이리 검지?”
내 입맛이 이상한가 싶어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남편 입에 넣어 주었다. 남편도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무슨 맛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