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범칙금을 돌파하라

빨간 불에서 배운 삶의 통찰

by 패셔니스타

“아아악.”

두 손으로 시뻘게진 얼굴을 덮고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후회와 모욕감이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전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현실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매달 말일이 다가오면 그달의 수업에 대한 간단한 피드백과 함께 다음 달 수업 안내와 교육비 공지를 문자로 보낸다. 대다수 학부모는 공지를 받은 후 늦어도 중순까지는 교육비를 낸다.


그런데 불경기는 확실히 불경기인 모양이다. 한 번도 교육비가 늦지 않던 몇 가정이 납부일을 다음 달로 슬슬 늦추더니 거듭된 독촉에 급기야 연락조차 피했다.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교육비를 떼인 일이 여러 번 있었던 터라 슬슬 불안해졌다. 그날도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던 학부모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다.

수업을 마친 후 강의실을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늦은 밤에도 습기를 잔뜩 머금은 후텁지근한 공기가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가슴을 세게 짓눌렀다. 한숨을 푹푹 쉬며 차에 올라탔다. 에어컨을 세게 틀었지만 시원한 공기는 갑갑한 내 속을 뻥 뚫어주지 못했다.


늘 다니던 길이었다. 속도를 조금 내려는 순간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한적한 주택가였다. 번화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 데다 이미 시간이 늦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보행자가 없어도 그곳을 지날 때면 으레 빨강 신호등 앞에서 정지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대는 잡생각 때문이었던지 나도 모르게 빨강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렸다. 뒤늦게 아차 했지만 이미 교차로를 한참 지나온 뒤였다.


‘에이, 설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있겠어?’


굽이진 길로 쭈뼛거리며 나아가던 내 차 앞으로 제복을 갖춰 입은 훤칠한 경찰관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앞을 가로막으며 차를 인도 쪽으로 대라고 손짓했다. 음주단속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전방에 빨간 정지 표지판이 중앙선에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져 창문을 열었다. 그는 내가 신호위반을 했다며 운전면허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속으로 툴툴거리며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고 있으려니 그는 위반 시간과 위반 행위를 딱딱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고지했다.


“9시 35분 OO 아파트 앞 건널목 빨강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무시하고 달리셨어요. 명백한 신호위반입니다. 범칙금과 벌점 15점이 부과될 예정입니다.”


범칙금도 범칙금이지만 벌점이라니. 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내 슬그머니 내밀었다. 벌점 없는 위반으로 끊어주면 안 되냐고 사정해 볼 새도 없이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손에 쥐고 있던 단말기에다 뭔가를 입력했다.


“바로 앞에 정지 신호가 보였을 텐데 못 보셨어요? 아니면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하고 계셨거나 운전에 방해되는 다른 일을 하고 계셨을까요?”

그래, 운전할 때는 운전만 해야지. 운전 중 산만한 행위는 나의 안전뿐만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머릿속을 끊임없이 누비고 다니는 불안한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와 전방의 정지 신호를 가렸다고 해 버릴까. 그러기에는 내 변명이 너무 치졸했다.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기고 잠자코 있자니 그는 단말기를 바짝 가져다 대며 서명하라고 했다. 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처벌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가벼운 놈으로 죄명을 옮겨달라고 아양을 떨어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나와의 볼일을 얼른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날 태세를 취했다. 단말기에서 갓 뽑아낸 따끈따끈한 범칙금 고지서를 건네며 얼굴과 다리는 반대쪽으로 향하는 그는 마치 이집트 벽화 속 인물처럼 보였다. 벌점이 영구적인지 묻는 내게 그는 귀찮은 듯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벌점은 3년간 유지되며 착한 운전자 마일리지를 적립하면 1년에 10점이 감해집니다.”


경찰서 민원실이나 관할 지구대에서 마일리지 신청을 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창문을 닫았다. 후회와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단전 아래서부터 후끈거리던 열이 얼굴로 몰렸다. 돌돌 말린 범칙금 고지서를 손에 꽉 움켜쥔 채 주먹을 쥐고 핸들을 쾅쾅 때렸다. 고음을 최대치로 뽑아 올려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혹시 운전 부주의로 다음에 벌점을 또 받게 된다면 그때는 면허 정지인데. 아무리 후회한들 시간을 앞으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으로 오자마자 나는 남편에게 쪼르르 달려가 퇴근길에 겪었던 불운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남편은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나 싶더니 겨우 두 문장으로 내 열띤 분노를 일축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쩔 거야? 씻고 쉬어.”


그래, 어쩌겠는가. 타임머신을 타고 10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거실로 나가 '라이언 홀리데이'의 <돌파력>을 꺼내 들었다.


16세기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의 저서 <오륜서>에서 관찰과 인식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관찰의 눈은 오직 현상만을 바라보지만, 인식의 눈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그 너머를 본다. 다시 말해, 관찰하는 눈은 편견, 과정 또는 오류의 개입 없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반면 인식하는 눈은 하나의 사건에서 ‘난공불락의 장애물’, ‘심각한 위기’, 또는 ‘문제’를 바라본다.


우리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인식의 눈으로 보며 감정을 섞어 판단함으로써 문제를 크게 만든다. 하지만 사건에서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면 그 문제가 별것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관찰하는 눈에 의하면 그날 나는 직무 수행 중이던 경찰관에게 신호위반 사실을 적발당했을 뿐이었다. 경찰은 자신의 역할에 따라 범법자에게 벌금과 벌점을 부과했고 나는 범칙금을 납부하고 다음부터 조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 인식의 눈은 내가 저지른 잘못에 불안한 감정을 덧입혀 문제를 부풀렸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억울해했다. 그날 경찰에게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후로도 보행자가 없는 건널목에서 정지 신호를 계속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큰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범칙금 고지서를 꺼내어 거기에 적힌 계좌번호로 송금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다음 날 교육비를 미납한 학부모들에게 전화와 문자를 다시 한번 돌렸다. 아이들의 학습 상황을 간단하게 상담하고 그달 내에는 꼭 교육비를 내어주십사 당부했다. 다들 깜빡했다며 흔쾌히 교육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쓸데없는 기우로 속앓이 했던 며칠의 기억이 씻은 듯 사라졌다.

퇴근 후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리창 와이퍼가 좌우로 움직이자 시원하게 내리치는 빗줄기가 숨 막힐 듯 텁텁한 공기를 저만치 몰아냈다. 건널목 빨강 신호등에 천천히 멈춰 섰다. 신호등이 깜빡이고 녹색불로 바뀌기 전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행인 한 명이 건너갈까 말까 망설이는 듯 엉거주춤하게 서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지나가라는 손짓을 하고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는 내 차 앞을 지나다 말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어 보였다. 총총히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내 입가에도 반달 미소가 걸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눈사람의 벚꽃엔딩[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