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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주일장춘몽 Jul 11. 2022

황새바위 순교성지에서 떠올려 본  옛날이야기

낯선 눈으로 보고 쓰는 공주


오늘따라 등에 업힌 둘째가 유난히 칭얼거린다. 한시가 급한데 뛰다시피 하는 잰걸음에 손목을 잡힌 첫째도 조만간 울음을 터트릴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어리광을 받아줄 형편이 못된다. 이미 사람들이 산처럼 모여 있을 터여서 까딱하다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남편이 사학 세력으로 끌려가 공주 감영 감옥소에 수감된 지 이 년이 다 되어간다. 남편은 고향인 내포에서 천민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총기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남편은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학에 빠져들었고 이존창 루도비코를 만나면서 천주님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졌다.      


공산성은 벌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건너편 황새바위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는 마치 대보름 달맞이 동제를 하는 것 마냥 발 디딜 틈 없다. 땀에 젖은 등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내리는 둘째 아이를 추켜올리고 뛰다시피 하는 큰아이를 잡아끌면서 기를 쓰고 사람들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서.     


남편이 영세를 받고 얼마 뒤 나도 영세를 받았다. 그러니 나도 천주교인이다. 예산 깊은 산골에 숨어있던 남편이 끌려간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내발로 감영에 찾아가려 했다. 나도 천주교인이라고. 남편과 함께 잡아가라고. 하지만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어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말에 차마 감영까지 가지 못했다. 대신 남편 소식을 듣기 위해 내포를 떠나 공주로 왔다. 낯선 곳에서 닥치는 대로 궂은일 하며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언제 풀려날지, 언제 형을 받을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에 비하면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신유년이 시작되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학죄인들을 곧 처형할 거라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삼기 위해서라도 고이 보내지는 않을 거라는.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공산성에 오르니 제민천 건너 황새바위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목에 커다란 항쇄를 찬 천주교인 열여섯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얼마나 치도곤을 당했는지 남편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남의 것을 훔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해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큰 잘못이라고 사람을 저토록 참혹하게 망가뜨린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아예 목숨까지 빼앗겠다니 대체 이게 사람이 사람에게 해도 되는 짓인가. 천주님은 저들의 피 끓는 신음과 기도가 들리지 않으시는가. 우리는 그동안 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기도했단 말인가.      


남편은 자유롭고 떳떳한 천주교 신자로 살다가 천주교 신자로 죽고 싶다던 소원을 이뤘으니 여한이 없을까? 그 소원을 나와 아이들도 들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1801년 2월 28일               








작년 봄 처음 엄마와 황새바위 성지에 왔다. 별 기대 없이 산책이나 할 겸 들렀는데 걷는 족족, 보는 족족 마음에 들어왔다. 특히 엄마가 많이 좋아하셨다. 오죽하면 욕심껏 다니시다가 허리에 큰 무리가 갈 정도였을까. 엄마가 유독 좋아하셔 선지 요즘도 황새바위 성지에 가면 자동적으로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랑 또 와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황새바위 성지는 천주교 박해 당시 군중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충청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참수형이나 장살형이 처했던 천주교 순교성지다. 이곳에서 순교한 천주교인은 확인된 수만도 337 명, 미확인 순교자까지 합치면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새바위 성지는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모래사장 위 옛 공주 감옥 터 뒷산이다. 제민천 건너편으로는 공산성이 위치하고 바로 아래에는 제민천변이 있어 처형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볼 수 있었다. 공개 처형지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서울 합정동의 절두산 순교성지와 같은 조건을 갖고 있다. 공개처형이 있는 날이면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맞은편 공산성이 거대한 병풍을 세워놓은 것 같았다고도 한다.     


목숨과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 믿음이란 무엇일까. 종교가, 신이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지만 정작 그 믿음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 때 끝까지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더 이상 순교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목숨을 버릴 정도의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 없을 뿐이지 나의 믿음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신앙인이기에 이웃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나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신부님께서 세례 받기 직전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참아야 하고 많이 손해 봐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도 많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저 문을 나가면 됩니다. 누구도 말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갖겠다고 약속한다면 그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켜내야 합니다.’              



      

황새바위 성지에 가면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옛날 기도문을 볼 수 있다. 산책로 돌판에 새겨진 기도문을 보면 내용은 대충 이해가 되지만 용어나 형식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고 그래서 많이 어렵다. 기도문을 찍어서 가장 좋아하는 수녀님께 보냈는데 수녀님이 국민학교 2학년 때 처 영성체 교리로 외웠던 기도문이라며 반가워하셨다.      



돌로 만든 커다란 관이 있는 지하 무덤 위로 붉은색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인 작은 기도처가 있다. 마치 돌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심을 상징하는 것 같다.     




황새바위에서 처형당한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몇 개의 바위가 서 있다. 이름과 세례명, 나이가 명확하게 밝혀진 사람부터 세례명만 확인된 사람, 성씨만 확인된 사람 등 총 33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얀 타일이 이색적인 부활성당 안은 고요하다. 한여름 장마에 밖은 찜통 속 같아도 경당 내부는 시원하고 쾌적하다. 언덕이 이어지는 성지를 돌아보느라 올라온 열기를 식히며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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