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January. [룬샷]을 읽고나서
2년 전 회사를 옮기고 나서 생긴 변화 중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종무식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기에 옮기고 나서 정식으로 종무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여유로운 마음으로 출근해서 가벼운 연말 인사를 나눈 뒤 한해를 회고하며 업무를 종료하고 집으로 간다.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기 전까지 휴식이다. 종무를 처음 맞이했던 2020년 겨울은 별다른 계획 없이 1주일을 보냈다. 올해는 가을이 시작될 때쯤 아내와 상의해서 연말 휴식을 준비하였고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메신저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XX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신 책이 있는데, 오늘 중으로 시간 되실 때 오셔서 수령 부탁드립니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의 고지를 받는듯한 음성을 들었다 '연말에 좋은 책을 선물하니 꼭 쉴 때 읽어보도록 하세요...' 지옥과 같이 섬뜩하고 두려웠다기보다는 그동안 책 읽기에 나태했던 나에게 보내는 꾸짖음이 섞인 정감 어린 조언이었다. 평소에 그나마 비행기 안 좁은 좌석에서 책 읽기를 즐겼다.
2021년 마지막 연휴의 시작을 이 책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제주도행 비행기에 내 몸을 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원래 책 읽기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러던 중 군대 시절을 겪고 나서 극한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다. 제대 후에도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서적들을 읽었다. 주로 내가 구입하게 되는 책들은 건축/디자인 영역의 책들이었고 경영서적은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룬샷은 책의 두께감이나 표지 디자인을 봤을 때 내 돈 주고 살법한 책은 아니었다. 부담스러운 분량에 그다지 멋지지 않은 책 디자인.(심지어 나는 와인을 고를 때 맛보다는 라벨 디자인을 더 중요시 여긴다) 완독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의 고지가 아니던가! 비행기를 타자마자 망설임 없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이 두껍고 무거워서 책을 들고 보기가 쉽지 않았다는 걸 제외하면 꽤나 재미있게 읽혀내려 갔다. 물리학의 개념이 비즈니스의 역사적인 사건과 접목되어 풀이되는 내용이 나의 얄팍한 지식의 깊이를 조금씩 채워주었다. 무엇보다 나는 경영자는 아니지만 지금의 나의 오피스 생활 태도와 하나씩 비교해보면서 나를 점검해보는 재미가 더 좋았다.
룬샷 loonshot
"주창자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프로젝트"
29살이었던 겨울, 나는 '30대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30대 준비운동'이라는 게 거창한 것은 아니라 나의 30대를 정의해보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30 대란 '젊음을 기반으로 노련함을 길러야 하는 시기'이며, 나이 듦에 대해서 슬프지만 인정하며, 인생의 노련함을 수련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 시대의 평가로 '꼰대'가 되기 싫어 '철없이 살자'를 가벼운 30대의 모토로 삼아 한 해 한 해를 보냈다. 30대가 끝나가는 39살의 겨울, 룬샷의 의미를 처음 접하고 나서 과연 난 '30대 준비운동'의 마음가짐으로 지냈는지를 회고해보았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룬샷의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갈 때쯤 나의 30대는 '나사 빠진 사람'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주어진 나의 업무에 대해서 항상'?'를 많이 던지고 해결해보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변화를 즐기고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라고 평가받는 다면 어느 정도 룬샷의 분류에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프로젝트' 보다 그동안 나의 30대의 프로젝트들은 '항상 나를 부정하고 새로움을 추구했던 프로젝트'라고 정의하고 싶어졌다.
오피스 내의 여러 공간을 다루면서 매번 예전의 나를 부정해야 했다. 항상 매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하지만 그것을 실제 구현하고 나면 부족함이 생기고 개선점들은 항상 남아있다. 그래서 비슷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대할 때마다 예전의 나를 부정하며 자기 복제를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꽤나 '네가 이런 거까지 해야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공간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른 분야, 다른 시각까지를 담아내려 노력했다. 그게 어쩌면 나의 30대를 준비 운동한 만큼의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다수의 사람들이 살면서 '엔트로피'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해봤겠는가? 사실 이 책을 완독하고 난 나조차 아직 그 개념에 대해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어렴풋한 이해로 상전이, 동적 평형들을 해석하다 보면 결국 지금의 나의 상태와 연결 지어 이해하는 게 가장 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회사에서 난 기업문화팀 소속이었다. 지금은 생소하지 않지만 그 당시 총무팀을 기업문화팀으로 바꾸어 일반적인 총무업무 이외에 조직문화, 공간까지 다루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당시 기업문화팀의 미션은 직원들을 고객으로 생각하며 항상 모든 일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총무의 업무 영역 안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에 대해서 기존의 룰은 지키는 범주 안에서 조금의 변화를 만들어 나갔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그러던 중 조직개편으로 이름이 전통적인 총무팀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뭔가 똑같은 일을 하지만 예전에 있었던 엣지와 힙함이 없어졌다. 별거 아니었지만 그 작은 변화가 내 태도를 바꾸었다. 기존의 관행을 지키려 했고 도전을 주저했다. 순간적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유지했던 새로움에 대한 갈망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때 많은 깨닮음이 있었다. 아! 총무는 힙함을 잃는 순간, 정체성을 쉽게 잃어버리는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나라도 힙한 총무 요원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업무지원팀으로 일을 하면서 총무의 힙함을 항상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동료들에게 총무 요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힙해지고 싶은 발악이다. 그리고 이곳에 오고 나서 다양한 회사의 총무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또 다짐한다. 내가 저들과 차별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나의 업무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요원들이 변하지 않으면 그들은 안주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총무의 업무 특성상 규정과 룰을 만들고 이를 준수해야 하는 특성상 엄격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항상 매번 변화의 순간에 내적 갈등이 생긴다. 균형을 찾아야 하는 일이다. 동적 평형 상태에서 상호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새로움은 기존의 관행을 깨며 태어나는 것이고 변화를 위해 기존의 룰에 특혜를 만들어서도 안된다. 그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나의 2021년 마지막 30대였다.
여행을 마치고 난 40대가 되었다. 새해 아침에 밝고 10살이 된 딸이 먼저 내게 "아빠 오늘부터 40대구나"라며 깔깔대고 비웃었다. 처음 10대가 된 딸에게 좋은 놀잇감이 되었다.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40대,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불혹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오피스 생활자로서 다양한 오피스 생활자들을 다루는 공간들을 작업하며 많은 사람들과 호흡했다.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머릿속을 스쳐가지만 결국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매번 찾아오는 위기에 대한 나의 태도들이었다.
때로는 따분했고 한심 없었고, 때로는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도 어느새 관리자가 되었다. 40대의 첫 1월을 보내며 어쩌면 잘 못 지킬지도 모르는 새로운 약속, 다짐들과 그동안 잘 지켜왔단 내 태도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점검해보았다. 아직까지 철없이 살고 싶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센스 있고 힙한 일들을 하고 싶고, 무엇보다 나와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이 일하고 싶은 오피스 생활자가 되고 싶다. 첫 회사 입사 면접에 어느 한 여성 임원분의 마지막 질문은 "민재 씨는 꿈이 뭐예요?"였다. 옆에 같이 면접을 보았던 동료는 열심히 일해서 능력 있는 팀장이 되는 것이라 답했다. 나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입니다"였다. 그 후기를 동기들에게 술자리에서 이야기했고 난 불합격을 예상했다. 하지만 난 당당히 합격해 오피스 생활자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나의 꿈은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다. 40대의 나의 모습도 그때 그 마음과 같기를 기대해 본다